[다산칼럼] 반자유주의적 노동법의 역설
더불어민주당은 27일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의 강령을 ‘노동자와 시민의 권리 향상’에서 ‘노동중심’ 강령으로 개정했다. 원래는 노동자를 뺀 ‘시민의 권리 향상’을 뜻하는 ‘시민중심’ 강령으로 개정하려고 했지만 “노동자 삭제는 정체성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노동계급을 중시하는 강령을 채택한 것이다. 계급적 강령이 우리의 이목을 끄는 이유가 있다. 자본은 노동의 적(敵)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인식이 짙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인식에서 생겨난 게 유서 깊은 노동 관련 법제가 아니던가.

노동 거래에는 계약의 자유가 핵심인 시민법(사법)을 적용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별도로 도입된 게 노동법인데, 이는 자본은 억압하고 노동은 보호하는 내용의 반(反)시장적 차별법이다. 유감스럽게도 자본에 대한 노동법적 인식은 틀렸고, 이를 기반으로 하는 노동시장통제정책은 실업과 빈곤을 불러와 노동자의 삶을 더 어렵게 하는 게 현실이다.

노동자의 생활수준 향상에 필수적인 게 자본이라는 것, 그래서 자본은 친구라는 건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는 대신 그물, 카누 같은 자본재를 이용하는 사례에서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일자리 창출과 노임 증대를 통해 노동자 삶을 개선하는 유일한 길은 저축된 자본의 투자다. 한국의 고용과 노임이 과거보다 수십 수백 배 높고 미국 노임이 인도보다 높은 이유, 유럽 노동자의 삶을 풍요롭게 한 것 등 모두가 자본 덕분이다.

그럼에도 좌파는 산업혁명의 예를 들어 자본의 노동 착취를 설명한다. 역사적 기록을 보면 그건 사실무근이다. 프롤레타리아에 고용 기회를 줘 노동만으로도 먹고살 수 있게 만든 것이 자본이었다. 물가 하락을 통한 실질노임의 상승을 통해서도 노동자의 생활수준이 개선된다. 컴퓨터, 자동차, 통신수단, 의료기구 등 모든 상품은 자본에 의한 생산성 향상으로 가격이 하락해 실질노임이 상승하는데, 이게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다. 그런 매혹적인 물가 인하를 목격하고 자본주의는 빈곤의 원인이라는 마르크스 이론은 틀렸으니까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사회주의자 에드워드 베른슈타인이 아니던가.

물론 어떤 경제체제에서나 자본이 노동의 친구가 되는 건 아니다. 경제적 자유가 광범위하게 인정되는 시장에서만 가능하다. 자유시장에는 자본과 노동이 화합해 빈곤·고용·해고·임금 문제를 분권적으로 해결하는 자생적 힘이 작용한다. 노동시장도 상품시장처럼 정부 간섭 없이도 형성되는 자생적 질서다. 별도의 노동법이 불필요하다. 자본가, 노동자, 소비자 등 시민들의 자유로운 행동을 안내하는 사법으로 충분하다.

그럼에도 좌파는 경제적 자유는 자본가에게만 유리할 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노동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적극적인 계획과 간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통제는 경제적 자유를 억압하고 노동자에게 유익한 일자리 창출과 소득 향상을 어렵게 할 뿐이다.

최저임금제 실패가 좋은 예다. 노동시장에서 형성되는 노임을 인위적으로 올리면 기업은 고용을 포기해 실업이 증가한다. 비정규직·파견근로자보호법 등도 일자리를 줄이는 부작용만 불러왔다.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모든 정책은 고용, 소득, 노동조건 등 노동 문제 해결은 고사하고 이를 심각하게 만들 뿐이라는 건 역사적·이론적으로 입증됐다.

오늘날 한국 경제의 높은 청년 실업, 빈곤층 확대, 낮은 성장도 노동시장통제 탓이다. 헌법으로 보호하는 노동조합도 반시장적이다. 노조가 쇠퇴할 때 노동자의 소득과 생활수준이 향상된 게 역사적 사실 아닌가. 노조는 비정규직·실업·빈곤의 장본인이라는, 그래서 노조는 문제이지 해법이 아니라는 건 수십 년 실험을 통해 입증된 경험칙이다.

이쯤에서만 보아도 노동의 적은 자본이 아니라 노동을 보호한다는 노동법이라는 게 확실하다. ‘노동법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반자유주의적 노동법체계로는 노동자 삶의 지속적 향상은 물론 자유와 번영도 영원히 기대할 수 없다. 사회주의적 자본 인식을 뿌리째 뽑아내야 한다.

민경국 < 강원대 명예교수·경제학 kwumin@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