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선상(船上) 회담
아편전쟁, 태평양전쟁, 몰타회담의 공통점은? 모두 배 위에서 결말을 봤다는 점이다.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선상(船上)회담이 상당히 많다. 이는 선상이 안전·보안에 유리한 데다 참석자를 제한하고 여유롭게 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1842년 아편전쟁은 영국 군함 콘월리스호에서 맺은 난징조약으로 종결됐다. 이 조약에 따라 중국은 홍콩을 영국에 할양했고 상하이 광저우 닝보 샤먼 푸저우 등 5개항을 개항해야 했다. 중국에는 치욕의 역사지만 오늘날 이들 도시가 번영의 상징이 된 것은 아니러니다. 태평양전쟁도 일본의 공식 항복서명은 1945년 9월2일 요코하마에 정박한 미 전함 미주리호에서였다. 승전국 배 위에서 최종 서명하는 것은 안전을 기하면서 승전을 부각시키는 효과가 있다.

냉전 종식을 선언한 몰타회담도 1989년 12월 지중해 몰타섬에 정박한 소련 여객선 막심고리키호에서 열렸다. 강풍으로 회담이 4회에서 2회로 축소되고, 부시 미 대통령이 귀밑에 멀미패치까지 붙였지만 정작 멀미가 난 것은 이 담판 이후 소련 붕괴에 휩쓸려 간 고르바초프였다.

우리나라도 역사의 분기점이 된 선상회담들이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두 달 만에 대동강에 이른 왜군과 예조판서 이덕형이 대동강에 배를 띄우고 강중(江中)담판을 벌였다. 협상이 결렬돼 선조는 의주로 몽진하고 평양도 함락되고 말았다.

6·25전쟁 때는 원산항에 정박한 덴마크 병원선 유틀란디아호가 휴전회담 장소가 될 뻔했다. 공산 측이 일본의 미주리호 항복서명이 연상된다며 개성으로 바꿀 것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이는 38선 이남인 개성을 중립지대로 만들어 유엔군의 북상을 막기 위한 전술이었다.

근래에는 1994년 카터와 김일성의 대동강 요트회담이 있다. 북한이 핵개발 의혹으로 세계를 뒤집어놓은 시절이다. 요트를 타고 경치에 취한 탓인지 카터는 미군 유해조사단 입북허용 대가로 대북제재 중단이라는 실책을 범했다.

선상은 통상 중립지대로 간주된다. 유럽 국가 간 통행 제한을 푼 솅겐조약은 1985년 룩셈부르크의 작은 마을 솅겐 부근의 모젤강에 띄운 배 위에서 조인한 것이다. 그런 전통이 있어선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EU의 ‘빅3’ 정상이 지난 22일 나폴리 인근 벤토테네섬에서 정상회의를 하고 항공모함 가리발디함에서 합동 기자회견을 열었다.

장소가 미묘한 상징성이 있다고 한다. 벤토테네섬은 무솔리니의 정치범 수용소였고, 가리발디함은 난민과 밀수꾼 단속이 주된 역할이다. 역사는 종종 물 위에서 이뤄진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