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언각비] '영란은행'은 없다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 5’가 얼마 전 예고편을 공개했다. 미국에서 내년 초 방영할 예정이라 한다. 2007년 국내에서도 방송돼 ‘미드 열풍’을 이끈 이 드라마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특히 천재 건축가로 나온 주인공 스코필드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네티즌은 그에게 ‘석호필’이란 한국식 이름을 붙여줬다. 발음의 유사성을 살린 감각적인 작명이었다.

우리 말글 역사에는 그보다 훨씬 전에 또 다른 석호필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16년 세브란스의전 교수로 들어온 캐나다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가 그다. 우리말에도 능통한 그가 스스로 지어 부른 이름이 석호필이다. 1970년 타계한 그는 외국인 최초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외래어표기법이 따로 없던 시절 우리는 외국의 인명이나 지명, 국명 따위를 한자음을 빌려 적었다. 피택고, 나파륜, 색사비아…. 알 듯 말 듯한 이들은 피타고라스, 나폴레옹, 셰익스피어를 옮긴 말이다. 조선 인조 때는 네덜란드 선원 벨테브레이가 태풍으로 표류하다 제주도에 상륙했다. 17세기 초다. 조선 최초의 귀화인으로 기록된 그의 한국 이름은 ‘박연’이다. 비교적 최근에는 알렉산더 버시바우 전 미국 대사가 ‘박보우(朴寶友)’란 이름을 얻었다. 2006년 3월 한미동맹친선회에서 지어준 것인데, 본명을 살리면서 ‘소중한 벗’이란 뜻까지 담은 절묘한 이름짓기다.

음역 방식의 외래어 표기는 우리말에서 오랫동안 위력을 떨쳤다. 아관파천의 ‘아관’은 러시아공관을 뜻한다. 아라사는 러시아를 가리키는 말로, 줄여서 아국(俄國)이라고도 했다. 요즘 아라사는 사라졌지만 아관파천은 화석처럼 남아 역사용어로 쓰인다. 버려야 할 말도 있다. ‘영란은행’이 한 예다. 잉글랜드를 한자로 음역해 ‘영격란(英格蘭)’으로 적고 ‘영’과 ‘란’만 따서 읽은 게 ‘영란’이다. 영국이란 국명도 여기서 비롯했다. 지금은 잉글랜드를 ‘영란’이라 하지 않으므로 영란은행 역시 쓸 이유가 없다. 잉글랜드은행 또는 영국 중앙은행이라 하면 충분하다.

며칠 전 광복절을 맞아 석호필 박사의 후손이 한국을 다녀갔다. 주말에 그의 묘소를 찾아 우리말의 뒤안길을 되새기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홍성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