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맥] 40달러대 장기 저유가, 중후장대 산업 경쟁력 부활 위한 축복
오랫동안 고유가 공포에 시달려온 한국이 이젠 저(低)유가를 걱정하는 상황이다. 글로벌 경제침체에 따른 국제교역 위축을 우려하는 속칭 ‘역(逆)오일쇼크’ 현상에 기인한다. 그런데 석유 해외의존도 100%인 한국에는 저유가가 좋은 일이 아닌가. 저유가를 걱정하는 건 에너지시장에 대한 이해 부족 탓이 크다. 올 들어 한때 두 배 급등해 배럴당 50달러 수준에 있던 국제 유가는 이제 배럴당 30~40달러 수준에서 오르내린다. 당분간 상하 20% 정도의 단기변동이 이어질 것 같다. 최근 글로벌 공급과잉의 해소 가능성이 일부 보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불확실해서다.

미국에서 촉발된 셰일혁명과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기능 붕괴라는 두 가지 대형변수의 상수(常數)화에 따른 것이다. 이로 인해 향후 10년 이내 유가 100달러 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며 향후 5년 이내 적정 유가는 40달러대라는 의견이 많다.
[뉴스의 맥] 40달러대 장기 저유가, 중후장대 산업 경쟁력 부활 위한 축복
이런 전망은 장기시장 변화를 고갈성 자원 렌트(Rent·초과이윤)이론으로 검증한 관련 학계의 연구 결과에서 나온다. 지난 40여년간 유가(2015년 불변기준)는 대략 15년 단위로 독점가격 기간(1973~1988년, 2005~2014년)과 경쟁가격 기간(1988~2004년, 2015년 이후)이 교차했다. 독점유가는 배럴당 50~100달러 수준이고, 경쟁유가는 25~50달러 수준이었다. 따라서 이론적 적정유가는 변함없이 2015년 불변가격 기준 50달러 수준이다.

세계 에너지 질서 변화 또한 유념할 만하다. 우선 미국이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 등장하면서 세계 에너지질서 주도국이 됐다. 이 결과 OPEC은 미국시장에서 퇴출되고 나아가 중국 등 아시아시장도 일부 상실할 위기에 처해 있다. 심지어 OPEC 종주국 사우디아라비아는 카르텔 유지의 필수요소인 공급조정자(swing producer) 역할까지 포기하면서 석유 증산에 나서고 있다. 더욱이 석유시장 구조가 원유 중심에서 제품 중심으로 바뀌어 정제·석유화학 등 관련 투자경쟁이 심화될 것이다. 사우디가 내년 중 국영석유회사(아람코) 지분 5%를 매각하기로 한 이유다. 한국 같은 비(非)산유국도 석유시장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가능하게 된 것이다. ‘실패한 카르텔’이라고 학계가 결론을 낸 OPEC의 행동변화에 유의해야 하지만 겁낼 필요는 없게 됐다.

10년 내 100달러 시대 안 올 것

사실 한국은 이미 저유가 혜택을 누리고 있다. 2012년 약 1082억달러(약 1억8000만배럴) 상당의 원유 수입액이 작년에는 550억달러로 절반 수준에 그쳤다. 수입 물량은 증가(8%)했는데도 500억달러나 국제수지가 개선된 것이다. 석탄, 가스 등 기타 에너지 및 광물 가격하락 효과를 감안하면 연 1000억달러 이상의 수입절감 효과를 본 것으로 추정된다. 총수입의 3분의 1을 차지했던 에너지 수입액이 5분의 1 이하로 떨어져 경제에 그만큼 보탬이 된 것이다.

일부 에너지산업은 저유가를 등에 업고 별다른 정부지원 없이 경쟁력을 개선해 나가고 있다. 저유가로 큰 타격이 예상됐던 정유산업은 유가 하락속도보다 정제마진 하락속도가 느리다는 구조적 특성과 중국 등 주변국 투자동향 등을 잘 활용해 2011년 이후 최고의 경영성과를 내고 있다. 유가가 떨어지면서 석유화학산업의 기초 원료인 납사(naphtha·석유정제 부산물) 가격도 하락했지만 중국과 동남아 등지의 수요 확대로 제품 가격은 상대적으로 덜 떨어져 이익 규모가 커진 것이다. 이처럼 저유가는 원료비 절감은 물론 소비자 구매력을 높여 마진을 올리는 선순환 경제체제를 가능하게 한다.

당초 한국은 유가가 10% 하락하면 0.3%대의 성장촉진과 물가하락 효과가 기대됐다. 국내총생산(GDP) 2~3%포인트 상향 조정이 가능한 수준이다. 그러나 글로벌 경제침체로 인해 전반적으로 수출이 부진했고, 장기침체 우려가 커지면서 이런 긍정적 효과는 힘을 잃었다. 국가 경제를 아우르는 저유가 대책이 부족했으며 글로벌 경제환경이 받쳐주지 못한 것이다. 고유가 시대가 곧 다시 온다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정책기조를 서둘러 저유가의 장기화에 부합하게 전환해야 한다. 국제 유가는 우리 맘대로 조정할 수 없지만 유가 상황에 따른 대응전략을 수정해 가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에너지산업·창조경제 융합 필요

저유가 상황은 에너지 생산국에서 소비국으로의 부(富) 이동을 유발한다. 저유가를 활용하는 새로운 국가전략 요체는 고질적인 에너지 다소비형 경제구조를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중화학공업 등 에너지 다소비형 산업의 퇴출이 아니라 구조개혁을 통한 경쟁력 회복에 중점을 둬야 한다. 이는 기존 투자의 매몰비용을 극소화하는 일이다. 미국의 경우 셰일가스 양산으로 천연가스 가격이 크게 하락한 계기를 활용해 철강·금속, 석유화학, 자동차 등 범용산업의 국제경쟁력을 되찾고 있다.

한국의 에너지산업도 경쟁력을 키울 여지가 많다. 막강한 국내 정보통신기술(ICT) 접목, 동북아 시장에서 일본 중국 등과의 상호보완, 전력과 석유정제·화학산업 경쟁력(규모의 경제), 동북아 에너지물류의 지정학적 중심지란 이점을 살릴 수 있다. 이런 에너지부문 경쟁력을 활용한다면 지금껏 청산 대상으로 여겨 온 중후장대(重厚長大)형 산업의 부흥을 기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현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인 ‘창조경제’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창조경제는 기존 경제체제의 혁신을 통해 요소투입 위주 경제구조의 단점을 보완함으로써 장기 지속가능한 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다. 따라서 에너지산업과 창조경제의 결합을 통해 경쟁력 있는 신에너지산업 육성이 가능한 것이다. 2030년에는 전기차, 스마트그리드, 탄소 재활용 등 100조원 규모의 신규시장 창출, 신규고용 50만명, 온실가스 감축 5500만t 달성을 기대하고 있다. 더욱이 신에너지산업은 ICT와의 혁신요소 융합을 통해 다양한 비즈니스모형 개발이 가능하다. 세계 주요국들이 지속가능한 경제 성장과 기후변화 대응 효율화라는 두 개의 목표를 동시 달성하기 위해 에너지부문에서 새로운 성장동력 창출에 힘쓰는 이유다.

‘성장+기후변화대응’ 모델 창출해야

고유가로 큰 고통을 감내해 온 한국은 최근의 저유가를 활용, 국내 산업의 ‘롱테일(long tail)’ 효과(비주력산업이 주력산업보다 더 큰 가치를 창출하는 것)를 극대화하면서 기술혁신 등 제4차 산업혁명 논리를 가미한다면 신에너지산업 등 한국 고유의 지속가능한 성장모델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유가예측능력을 제고해 미래 불확실성에 적극적으로 대비하면서 저유가라는 오랜만의 호기를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중동 건설수출 신화와 오일쇼크 공포는 이제 잊어야 한다.

최기련 < 아주대 에너지학과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