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내 편'과 '네 편' 가르는 법
“누가 우리 편인가(Who is us)?” 이런 제목의 논문이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등장한 것은 1990년 초였다. 저자인 로버트 라이시 UC버클리 교수의 논지(論旨)를 요즘 말로 요약하면 ‘기·승·전·일자리’다.

“어떤 회사가 진정한 ‘미국 기업’인가. 일본에서 활동하는 IBM저팬인가, 미국에서 자동차를 만들고 일자리를 창출하고 세금을 내는 도요타아메리카인가.” 자문(自問)에 이은 그의 자답(自答)은 명쾌했다. “누가 소유했느냐(owned-by)가 아니라 어느 곳에 둥지를 틀었느냐(based-in)를 기업 국적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통념을 깨뜨린 주장은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1992년, 미국 내 일자리가 급속하게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1980년대 말 650만명이었던 실업자가 1000만명에 육박하고, 5%대 초반에 머물렀던 실업률이 7%를 넘어서고 있었다.

민주당 대선 후보로 나선 빌 클린턴은 라이시 교수를 선거캠프에 영입했고,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는 고용정책을 총괄하는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일자리 창출의 엔진(the engine of job creation)은 민간부문이며, 규제혁파가 1차 과제다.” 클린턴과 라이시는 진보 진영을 대표하는 정치인·경제학자였지만 미국인들에게 시급한 일자리가 어떻게 해야 창출되는지를 정확하게 짚고 있었다.

기업 국적에 대한 기준을 새롭게 제시하면서까지 총력을 다한 해외 기업 유치 정책은 독일 메르세데스벤츠, 일본 도요타와 혼다, 네덜란드 필립스 등의 대형 공장 투자를 이끌어내는 결실을 맺었다.

오는 11월 치러질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로 확정된 빌 클린턴의 부인 힐러리도 ‘일자리 보전과 창출’을 대표 선거공약으로 내건 사실이 흥미롭다. 일자리에 방해가 된다면 기존 무역협정들도 모조리 재검토하겠다고 선언했을 정도다.

미국만이 아니다. 각국 정부마다 일자리를 지키고 늘리기 위한 ‘전쟁’이 치열하다. 해외로 나간 기업들의 공장을 본국으로 되돌리는 리쇼어링(reshoring) 정책을 앞다퉈 추진하면서 속속 ‘전과(戰果)’를 올리고 있다. 독일에서는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가 아시아로 옮겼던 생산라인을 24년 만에 본국에서도 재가동하기로 했고, 일본 정부는 해외 이전 기업의 유턴을 지원하는 국가전략특구를 조성해 도요타 닛산 등의 ‘귀환’을 이끌어냈다.

한국 상황을 얘기하자니 답답해진다. 주자학적 명분론에 포획당해 있는 일자리마저 날리고 있다. 국토 균형발전을 명분으로 내건 수도권 규제가 단적인 예다. 2009년 이후 5년간 수도권 규제로 인해 투자계획을 철회한 기업 가운데 지방으로 공장을 옮긴 기업은 9곳에 불과한 반면, 28개 기업이 아예 해외로 나갔다는 보고서(한국경제연구원)가 나왔지만 정치권은 요지부동이다. 62개 기업은 수도권 규제 탓에 공장 신·증설 시기를 놓쳐 3조원이 넘는 손실을 봤고, 1만2000여개 일자리를 날려버렸다는 분석도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입법권을 남용한 각종 규제법안이 쏟아지면서 기업들이 곳곳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다. 대·중·소기업을 대표하는 대한상공회의소의 박용만 회장이 ‘규제폭포론’을 절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20대 국회가 (지난달에) 개원하자마자 180개의 기업 관련 법안을 내놨는데 그중 3분의 2인 119개가 규제법안이다. 기업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를 정도다.”

“법은 미니멈(최소한의 기준)이 돼야 하고 논의가 깊이 들어가야 하는 것도 있는데, 그냥 확 발의된 느낌”이라는 그의 하소연이 클린턴-라이시의 ‘(일자리 창출의 엔진은 기업이라는) 발견’과 겹쳐진다. ‘일자리’ 관점의 성찰로 기업 국적에 대한 정의(定義)마저 새롭게 내렸던 간절함과 절박함이 한국의 정치인들에게는 왜 없을까. 성찰이 부족한 걸까, 지력(知力) 자체가 못 미치는 탓일까. 일자리의 원천인 기업들을 ‘내 편’이 아닌 ‘네 편’으로 몰아가는 저능(低能)·불임(不妊)정치의 대수술이 시급하다.

이학영 기획조정실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