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임기자 칼럼] 손학규의 '하산' 조건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다.”

독일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가 한 말이다. 정치는 수학적·과학적으로 따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많은 변수를 고려하고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해 이상적인 해결책을 찾아가는 과정이란 얘기다. 양극단을 피해 절묘한 타협을 도출해야 한다. 무엇이 가능하고 불가능한지를 가려내는 안목과 불확실함을 극복해 내는 용기도 필요하다. 정치에 대한 긍정적 뉘앙스를 풍긴다.

정치가 가능성의 예술이 되기 위한 제1의 조건은 정치인의 일관된 태도와 시각이라고 정치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이 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정치는 예술이 아니라 협잡의 다른 형태가 될 것이란 이유에서다.

여의도 정가에선 이와 비슷한 ‘정치는 생물’이란 말을 즐겨 쓴다. 현실 변화에 맞춰 태도나 관점을 바꿔 나가는 게 정치라는 뜻이다. 우리 정치인들이 약속을 번복하거나 지키지 못한 데 대한 합리화, 변명의 수단으로 이 말을 이용한 것도 사실이다.

'가능성의 예술'과 '생물'의 차이

손학규 전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에 대한 야권의 구애 경쟁이 뜨겁다. 국민의당은 안철수 공동대표가 사퇴한 뒤 더 적극적으로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는 “(손 전 고문이 머물고 있는) 전남 강진의 흙집을 여러 번 노크했다. 당에 들어와 안 전 대표와 경쟁해야 한다”고 했다. 더민주에선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와 손학규계 의원을 중심으로 손 전 고문에게 빨리 ‘하산(下山)’해 더민주에 오라고 하고 있다.

손 전 고문은 2014년 ‘7·30 경기 수원병 보궐선거’에서 낙선한 이틀 뒤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정치는 들고날 때가 분명해야 한다. 지금은 물러나는 게 순리”라며 강진의 산골 흙집으로 내려갔다. 한 측근은 ‘셀프 유배’라고 했다. 손 전 고문은 2008년에는 총선 패배 책임을 지고 민주당 대표직에서 물러난 뒤 강원 춘천의 농가에서 칩거하다 2년 만에 복귀한 바 있다.

은퇴 번복에 대한 답 내놔야

칩거하던 그가 정치 현안에 대해 언급을 시작한 것은 지난해 11월4일이다. 카자흐스탄 등을 방문하고 귀국하면서 “정치가 국민을 분열시켜선 안 된다”고 말했다. 다만 정계 복귀에 대해선 “강진이 더 지겨워서 못 있겠다고 하면…”이라고 모호한 답을 내놨다.

지난 5·18 행사 참석차 광주에 들러 ‘정치권 새판 짜기’를 주장했다. 다음날 일본 특강에선 개헌 필요성도 강조했다. 정계 복귀를 선언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지만 다시 칩거에 들어갔다. 정치권에선 그의 정계 복귀를 ‘시간문제’로 보고 있다. 시점은 자신의 싱크탱크인 동아시아미래재단 창립 10주년인 7월28일 전후 또는 ‘대한민국 대개조’에 대한 구상을 담은 저서를 펴낼 8월 말께로 예상된다.

그가 정계에 복귀한다면 2007년, 2012년과 같이 대선 불쏘시개에 머물지, 주역이 될 것인지는 지켜볼 일이다. 다만 정계 은퇴 번복에 대해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분명한 답을 내놔야 한다. 왜 자신이 새판 짜기의 주인공이 돼야 하는지, 정치 발전을 위해 손학규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를 확실히 설명해야 한다. ‘가능성의 예술’이 아니라 또 하나의 변명을 담은 ‘생물’이 돼선 안 된다. 그러면 그동안 우리 정치인들이 숱하게 약속을 번복하면서 쌓은 정치 불신에 숟가락을 하나 더 얹는 꼴이 된다.

홍영식 선임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