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위기 극복하면 기회는 또 온다
조선소를 견학하려면 보호 헬멧 외에 보안경을 착용해야 한다. 쇳가루가 눈에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검은 쇳가루 얼룩으로 얼굴이 꼬질꼬질해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 조선소는 바다에 접해 있어 습도가 높다. 한여름에는 후텁지근한 찜통이 된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른다. 그런데도 불꽃을 내뿜는 용접 작업을 해야 한다. “비닐팩에 넣어야 하는 걸 깜빡 잊고 윗주머니에 넣어둔 담배가 땀에 완전히 젖어서 버리게 됐다”는 작업자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국 조선산업 세계 1위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1990년대 중반 일본을 누르고 세계 최고가 됐다.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 이른바 ‘빅3’는 세계 조선 수주량 1위에서 3위까지를 모두 차지했다.

해양플랜트 거품에 구조조정

한국 조선은 2000년대 들어 중국 특수에 힘입어 전례 없는 호황을 누렸다. 빅3의 하청 사업장이던 성동조선해양(2001년 설립), SPP조선(2005년) 등이 독립한 것도 이때다. 당시 ‘매일 한 척씩 선박이 완성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수주 풍년이었다. 그런 흐름을 타고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은 2007년 중국 다롄에 15억달러를 들여 조선소를 지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활황 끝의 무리수 확장이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자 선박 발주량은 급감했고 선박금융도 급격히 위축됐다.

빅3는 컨테이너선과 벌크선 등 상선 수주가 줄자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때마침 분 셰일가스 개발 열풍과 맞물려 해양플랜트 수요가 급증했고, 빅3는 이를 싹쓸히 했다. 삼성중공업이 1996년 이후 세계에서 발주된 142척의 드릴십 가운데 61척을 수주할 정도였다. 한 척에 5억달러가 넘는 고부가가치 해양플랜트로 한국 조선은 제2의 전성기를 맞는 듯했다. ‘중국 조선사가 아무리 추격해 와도 아직까지 기술력에서 차이가 난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여겨진 해양플랜트 사업에 거품이 끼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경험 부족에 따른 설계 변경으로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엔진 등 핵심 부품은 수입산이어서 수익성이 떨어졌다. 빅3가 조 단위의 손실을 기록하면서 대규모 구조조정에 몰린 까닭이다.

조선업 경쟁력 보존해야

한편에선 일본이 그랬듯이 한국도 이제 조선 세계 1위 자리를 중국에 넘겨줄 수밖에 없다고 얘기한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인건비 차이를 극복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과거에도 그랬듯이 위기를 극복하면 기회는 또 온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500원짜리 지폐에 있는 거북선 그림을 보여주고 배를 수주해 시작한 한국 조선이 세계를 제패하리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

조선업계에서는 이란 러시아 멕시코 등에서 대규모 해양플랜트 발주가 머지않아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텅 빈 도크를 채울 기회는 아직 남아 있다. 부실에 대한 책임 소재를 가리고, 저가 수주 등 잘못된 관행과 비효율을 바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구조조정의 큰 원칙은 조선산업을 살리는 것이어야 한다. 기술과 영업 기반은 도미노 블록처럼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원상 회복이 쉽지 않다. 채권단과 금융당국이 당장 눈에 보이는 숫자나 재무제표만이 아닌, 더 넓고 큰 구조조정 그림을 그려주기를 기대한다.

서욱진 금융부 차장 ventu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