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우편번호
‘하릭교 다리 북편 개천에서 동으로 가다가 좌편 첫 골 들어 좌편 둘째 집.’ 우정박물관에 전시된 대한제국 시대의 우편물 주소다. 이 판윤 댁으로 보내는 편지 겉봉에 한글과 한문을 섞어 썼는데, 묘사가 요즘 내비게이션 못지 않게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광복 후에도 사정은 비슷했다. 명동백작으로 유명한 소설가 이봉구에게 ‘한국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유네스코회관 건너편 골목 막걸리집 은성 내 이봉구 형’이라고 적힌 국제우편이 도쿄로부터 무사히(?) 배달되곤 했다. 허술한 행정에 우편번호라는 개념마저 없던 시절이었는데 용하기도 하다.

세계 최초로 우편번호를 고안한 것은 독일이라고 한다. 1853년부터 지역마다 식별 번호를 붙여 우표에 사용했다니 역사가 150년이 넘는다. 1961년 네 자리 우편번호를 체계화하고 1990년 통독 후에는 서독에 ‘W’, 동독에 ‘O’를 붙여 썼다. 지금처럼 다섯 자리 체계로 개편해 지역 숫자 두 자리와 발송용 숫자 세 자리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93년부터다.

영국이 우편번호의 원조라는 견해도 있다.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우편번호를 1959년부터 써왔으니 독일의 번호체계보다 빠르다는 것이다. 영국은 잉글랜드와 웨일스 등으로 행정 체계가 복잡하게 나뉘어 있어 5~7자리에 알파벳과 숫자를 섞어 쓴다. 미국은 1963년에 우편번호를 도입, 1983년부터 다섯 자리 지역 번호(ZIP)에 네 자리 숫자를 추가할 수 있도록 세분화했다. 일반인은 다섯 자리, 기업은 아홉 자리 번호를 써서 우편번호가 4만개 이상이라고 한다.

일본은 다른 주요 국가처럼 주소에 도로명을 사용하지 않고 우리나라처럼 행정 지번 체계를 쓰고 있다. 1998년 일곱 자리 숫자에 하이픈을 사용하는 체제로 전환했다. 우리나라는 우편번호를 1970년부터 썼다. 처음엔 다섯 자리였는데 맨 앞은 시·도, 둘째는 대(大)중계국, 셋째는 소중계국, 넷째와 다섯째는 집배국 번호였다. 우편물이 계속 늘면서 1988년부터는 여섯 자리로 바뀌었다.

다음달부터는 다시 다섯 자리로 바뀐 우편번호가 사용된다. 세 자리는 시·군·구, 두 자리는 도로·철도 등의 지형 일련번호다. 여섯 자리일 때 넣었던 하이픈을 없애고 다섯 자리를 나란히 붙여 쓴다.

아직 도로명 주소도 적응하기 어려운데 무슨 우편번호 개편이냐고 볼멘소리도 하지만 각종 소포나 택배 등의 물류 구분이 쉬워지고 배달이 빨라질 테니 그리 불평할 일은 아니다. 이참에 봉투를 새로 찍는 인쇄골목의 일손도 조금은 바빠지겠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