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엘리엇의 전격전이 두려운 이유
1939년 9월1일 새벽 4시45분 단치히 항(港). 오늘날 그다니스크라 불리는 폴란드 발트해 연안의 항만도시다. 독일 순양함이 일제히 단치히 해안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독일군은 ‘전격전(blitzkrieg)’으로 폴란드 국경을 단번에 무너뜨렸다. 2차 세계대전의 서막을 연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었다. 만약 폴란드가 기습에 대처할 충분한 방패를 가졌더라면 어땠을까. 2차 세계대전이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을지도 모른다.

최근 삼성물산에 대한 엘리엇매니지먼트의 공격도 비슷한 양상인 듯하다. 지난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계획을 발표한 직후인 6월3일 엘리엇은 삼성물산 지분 2.17%를 추가로 취득하고 총 지분율을 7.12%까지 확대하면서 삼성그룹 특수관계인, 국민연금에 이어 3대 주주로 올라섰다. 다음 날인 4일엔 엘리엇이 삼성물산에 대한 경영참여를 선언하고 9일에는 법원에 주주총회 결의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불과 2주일 만에 이뤄진 그야말로 ‘전격전’의 양태다. 한국에 경영권 방어에 대한 충분한 수단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삼성이 방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엘리엇이 국내 굴지의 기업인 삼성물산을 함부로 공격하는 일이 과연 가능했을까.

경영권 방어수단으로 차등의결권과 신주인수선택권(포이즌필) 등의 제도를 우리도 도입해야 한다는 논의가 꽤 오래전부터 있었다. 차등의결권 제도는 미국, 일본, 유럽 등 주요 선진국에서도 이미 일반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구글이나 페이스북도 이 제도를 적극 활용한다. 포이즌필은 우리말로 하면 ‘독약 처방’이라 할 수 있는데 독약을 보유해 이번 엘리엇 같은 포식자의 사냥 의지를 약화시키거나 단념하게 하는 제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현행법에는 이런 방패가 없다.

엘리엇은 냉혹하다. 돈 앞에선 아주 냉혹한 이들이다. 이들을 가리켜 ‘벌처 투자자’라고 한다. 영어로 ‘벌처(vulture)’는 대머리독수리를 뜻하는데, 벌처 투자자는 공중을 돌면서 먹잇감을 노리는 대머리독수리처럼 시세차익을 얻고 빠지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외국 기업사냥꾼의 ‘먹튀’ 사례는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2003년 영국계 펀드회사인 소버린자산운용은 당시 분식회계 사건으로 주가가 급락한 SK그룹의 주식을 대량 매집했다. 지배구조개선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이들은 주당 평균 9293원에 사들인 주식을 2년여 만에 5만2700원에 팔아 8000억원이 넘는 시세차익을 남겼다. KT&G에 대한 ‘기업 사냥꾼’ 칼 아이칸의 2006년 공격도 비슷했다. 이들 역시 시세차익으로 1500억원을 벌고 떠났다. 이처럼 우리 기업들이 이른바 ‘해외 먹튀세력’에 유린당한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충분한 경영권 방어제도를 마련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돈에는 국적이 없다. 엘리엇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는 투자자다.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지도, 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기업엔 국적이 있다. 삼성은 ‘대한민국 기업’이다. 해외에 나가보면 쉽게 느낄 수 있듯이 ‘삼성’이란 브랜드는 국가적 자산이다. 이제 한국의 대표기업에 대해서까지 해외 기업 사냥꾼들의 공세가 시작됐다. 이번 사태의 승자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제2, 제3의 삼성물산 사태가 재연될 공산이 크다. 또 다른 국부유출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엘리엇 같은 벌처 투자자에 맞설 수 있는 경영권 방어수단 도입을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여부를 결정할 주주총회 예정일까진 이제 사흘밖에 안 남았다. 우리 시장을 해외 먹튀 투기세력의 사냥터로 전락하게 하는 결정적 ‘전초전’이 되게 해서는 곤란하다.

배상근 < 한국경제연구원 부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