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포럼] 서정주·박목월과 정주영
‘밤새어 긴 글 쓰다 지친 아침은/ 찬술로 목을 축여 겨우 이어 가나니/ 한 수에 오만 원짜리 회갑시 써 달라던/ 그 부자(富者)집 마누라 새삼스레 그리워라./ 그런 마누라 한 열대여섯 명 줄지어 왔으면 싶어라.’

미당 서정주 같은 대시인도 가난은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시 ‘찬술’을 읽으니 빙긋 웃음이 나오면서도 오죽하면 이런 시를 썼을까 싶어 마음이 짠해진다. 그 시절엔 모두가 가난했다. 전북 고창 선운리에서 질마재 신화를 넘어 당대 최고 시인의 반열에 오른 미당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삶의 괴로움이 있는 까닭에 눈부신 기쁨도 있다며 ‘오늘 제일 기쁜 것은 고목나무에 푸르므레 봄빛이 드는 거와, 걸어가는 발부리에 풀잎사귀가 희한하게도 돋아나는 일’이라고 노래했다. 또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며 우리 마음의 빈 곳간을 가득 채워줬다.

탄생 100주년 맞는 거인들

2015년 새해는 그의 탄생 100주년이다. 그동안 절판됐던 그의 시 전집이 생일 즈음인 5월에 다시 나온다니 다행이다. 시 900여편과 시론, 전래동화, 여행기, 자서전 등이 30여권의 전집에 모인다고 한다. 친일 논란 등으로 생채기도 있지만 그래도 그는 우리 한국문학사의 보물 같은 존재다.

청록파 시인 박목월도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경북 월성 모량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북에는 소월, 남에는 목월’이라는 극찬을 들었다. 하지만 대가족을 건사하는 가장의 고달픔 또한 그의 몫이었다.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니 19문 반의 신발이 왔다’던 그는 성격이 꼼꼼해서 시를 연필로 꼭꼭 눌러 썼다. 그렇게 쓴 초고 노트가 200권에 이른다.

아들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가 그 육필 초고를 시집으로 내고 용인 모란공원묘지에 시비도 세우겠다고 한다. 그가 창간한 월간 시 전문지 ‘심상’을 40년 이상 외부 지원 없이 발간해온 아들이 이 잡지로 등단한 시인 100명을 담은 기념호를 내고 낭송회도 열 계획이라니 더욱 반갑다.

“이봐, 해봤어?” 아직 생생

한국 경제사의 거인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도 탄생 100년이다. 강원도 산골에서 소 판 돈을 들고 야반도주한 그가 최고의 기업가로 성공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이미 역사다.

지독한 가난을 극복하게 해준 에너지의 원천은 좌절을 모르는 긍정의 힘이었다. 갯벌 사진 한 장으로 초대형 유조선을 수주한 역발상뿐만이 아니다. 상다리를 물그릇에 담그고 그 위에서 자다 벽을 타고 오른 빈대가 천장에서 뛰어내리는 걸 보고 탄복했다는 ‘빈대론’은 필사적으로 하면 반드시 길이 있다는 ‘해봤어? 정신’으로 이어졌다. 돼지를 우리에서 내몰 때 앞에서 귀를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꼬리를 잡아당겨야 한다는 ‘돼지몰이론’도 숱한 경제이론을 뛰어넘는다.

생일이 11월25일이어서인지 기념사업 움직임은 아직 눈에 띄지 않지만, 전경련이 펴낸 정주영 전기 《이봐, 해봤어?》결정판은 벌써 나왔다. 하긴 왁자한 행사보다 그의 탁월한 경영철학을 되새기는 게 더 절실해 보인다. 내년 경제가 어둡다니 더 그렇다.

그렇잖아도 살기 어렵다고들 비명을 지르는데, 이런 때일수록 한국문학사와 경제사의 거인들에게 위안을 얻고 용기와 힘을 내면 좋겠다. “이봐, 해보기는 했어?”라는 말로 서로를 격려해 가면서.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