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과거 잘못 반성하는 미국의 용기
‘러시안룰렛·전동드릴·물 고문·항문으로 물 집어넣기….’ 2001년 9·11테러 이후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미 중앙정보국(CIA)이 알카에다 대원들에게 자행한 고문의 실태가 9일(현지시간) 폭로되면서 미국이 발칵 뒤집혔다. 유엔은 국제법에 따라 관련 책임자를 기소하라고 요구했다. 자칭 인권수호의 첨병인 미국의 체면이 한순간에 구겨졌다.

미국 내에서도 의회가 정부기관의 과거 만행을 샅샅이 공개한 것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가 만만치 않다. 이날 워싱턴DC에서 만난 직장인 마이크 제킨스는 “의원들의 행동이 국가정보국(NSA)의 무차별적인 도·감청 실태를 폭로해 나라 망신을 시킨 전직 CIA 요원 에드워드 스노든과 다를 게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CIA 고문보고서’ 공개를 밀어붙인 다이낸 파인스타인 미 상원 정보위원장은 “CIA의 고문 프로그램은 미국의 가치와 역사에 오점을 남겼다”면서도 “보고서 공개는 미국의 가치를 회복회고 전 세계에 미국이 정의 사회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중요한 조치”라고 강조했다. 파인스타인 위원장이 테러조직의 보복 공격, 정치적 논란 등의 부작용을 감수하고 보고서 공개를 강행한 데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강력한 지지가 있었다고 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특별성명에서 “어떤 나라도 완벽하지 않다”며 “미국을 강하게 만드는 힘 가운데 하나는 과거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더 좋게 변화시키려는 의지”라고 말했다. 치부를 드러내지 않고서는 진정한 반성을 하기 어렵다는 뜻이 담긴 말이다.

2008년 대선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맞붙었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공화당 내에서 드물게 보고서 공개를 지지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진실은 때론 받아들이기 힘든 법”이라며 “국민들은 진실을 알 권리가 있다”고 했다. 워싱턴의 한 외교전문가는 “미국이 왜 강한 나라인지 알 수 있게 하는 용기 있는 발언”이라고 했다.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담화까지 부정하려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새겨 들어야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장진모 워싱턴 특파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