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포럼] 농부시인 류기봉의 포도밭예술제
“자네 포도밭에도 시와 그림을 걸고 음악회와 시낭송을 해보면 어떤가. 사람들은 좋은 공연 즐겨서 좋고 자네는 포도 팔아서 좋고…. 프랑스에선 다들 포도밭에서 축제를 열던데….”

외환위기로 모두가 힘겨워하던 1998년, 경기 남양주 진접에서 포도농사를 짓던 류기봉 시인에게 스승인 김춘수 선생이 건넨 얘기다. 그렇게 해서 첫 포도밭예술제가 그해 열렸다. 포도나무마다 시가 주렁주렁 열리고 노래가 넘실댔다. 농약을 치지 않고 자연농법으로 포도밭을 일구던 그에게 더없이 어울리는 축제였다.

김춘수 시인이 제안…올해 17회

몇몇 포도나무에는 시인들의 이름을 붙였다. 김춘수 나무, 조정권 나무, 이문재 나무…. 쑥스럽지만 내 이름을 단 고두현 나무도 있다.

김춘수 선생은 7년 동안 아름다운 시와 문학 얘기로 포도밭 이랑을 적셨다. 얼마나 즐거웠으면 표정이 어린 포도잎 같았다. 그렇게 시골 포도밭을 유명하게 만들어주고는 2004년 11월29일 저세상으로 갔다. 떠나기 전엔 친필 원고 등 많은 자료를 주며 훗날 포도밭문화관을 만들 때 쓰라고 했다.

오는 30일(토) 오후 2~5시 열리는 17회 포도밭예술제는 선생의 10주기여서 더욱 뜻깊다. 생전에 ‘포도밭 담소’를 즐기던 조영서·서정춘·조정권·노향림·심언주 시인이 햇포도주를 올리며 선생의 삶을 회고한다. 박주택(경희대)·이승하(중앙대) 시인은 ‘김춘수의 문학세계’와 ‘농업과 생태, 그리고 시’를 얘기한다. 옛 시집 《꽃의 소묘》 탈고 과정의 육필 노트 등 귀한 자료도 전시한다.

이제는 300여명이 찾을 정도로 예술제 규모가 커졌다. 유명 시인들도 모이지만 유기농 포도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늘어난 덕분이기도 하다. 이날 남양주시농업기술센터의 친환경 포도 재배에 관한 설명을 듣고, 갓 수확한 포도와 포도식초를 맛보며, 김희진의 작은 음악회도 즐길 수 있다.

류 시인이 유기농법으로 포도를 키운 건 20여년 전부터다. 비료 대신에 당귀와 계피 감초 등을 발효시킨 ‘보약’을 주고, 꽃필 무렵엔 바흐와 모차르트 음악을 들려준다. 그래서 흙 속엔 지렁이와 미생물이 많다. 새와 풀, 벌레도 함께 산다. 다만 농약을 치지 않아 포도알이 작다. 벌레 먹은 자국도 있다. 봉지에 곰팡이 흔적까지 있다. “다른 유기농 포도는 알이 굵은데 왜 이러냐”는 항의를 자주 듣지만, 이거야말로 유기농의 확실한 증거다. 말만 앞세우고 농약 슬금슬금 치는 얼치기들 때문에 속이 탈 법도 한데 그는 빙긋 웃기만 한다. “씨와 껍질을 통째로 씹어 먹어야 몸에 좋아요. 그러려면 완전한 유기농이어야 하죠.”

30일부터 유기농 수확 체험도

수확은 주로 아침 5~7시에 한다. 전날 광합성으로 축적된 영양이 밤 사이 알에 다 모이기 때문이다. 한 송이씩 따는 동안에는 스승의 시 ‘꽃’을 음미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바로 그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포도맛과 문화가 어우러지는 포도밭예술제. 이번 주말에 아이들과 함께 신발 벗고 포도밭 흙을 밟아보면 어떨까. 참가비는 없다. 31일부터 9월20일까지는 가족·단체별 포도따기 체험도 이어진다. 구체적인 일정은 홈페이지(http://blog.naver.com/poetpodo)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두현 논설위원·시인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