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포럼] '개천의 용' 타령은 이제 그만
몇 해 전 고등학교 졸업 30주년을 기념하는 홈커밍 행사 때였다. 백발이 성성하신 은사님들과 더불어 까까머리 시절 감회에 젖는 것도 잠깐이었다. 불편한 장면이 눈에 들어온 탓이다. 사회를 맡은 친구가 참석한 동기들을 소개하는 순서였다. 맨 처음 고법 부장판사에 이어 고위공무원, 군·경찰 고위간부, 변호사, 의사….

다들 ‘출세한’ 동창들부터 소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데 왜 나만 어색할까. 까칠한 생각을 직업으로 하는 기자여서 그런가. 대개의 고교 동창회 행사가 엇비슷하다. 소개는 출세 순인 셈이다. 차라리 찬조금을 많이 낸 순이면 애교로 봐줄 만하다.

평준화가 교육사다리 허물어

21세기 들어서도 출세 기준은 별로 바뀐 게 없다. 악착같이 공부해 명문대 나오고 공직으로 입신양명하는 것을 출세로 친다. 제사 지방(紙榜)에 ‘학생부군신위’를 면하는 일이니 가문의 영광이다.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는 이토록 뿌리가 깊다. 고시를 패스한 자랑스런 동문은 모교에 플래카드로 내걸린다. 앞으로 동문들의 민원을 해결해줄 사람이라는 광고처럼 보인다.

요즘 그런 개천의 용이 안 나온다고 개탄하는 이들이 많다. 단순히 개탄 수준을 넘어 고시를 존치하자는 논거로 삼는다. 2017년 사시가 폐지되고, 행시(5급 공채)도 50% 줄이면 가난한 집 수재가 출세할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이란 주장이다. 개천의 용이 사라진 증거로 고시 합격자의 절반이 강남3구 출신이라거나 특목고 자사고 출신이란 점을 든다. 이에 편승해 진보교육감들은 평준화 강화만이 해법이라며 자사고를 없애고, 심지어 대학 평준화까지 벼르고 있다.

하지만 진짜 원인은 되레 평준화에서 찾을 수 있다. 과거엔 가난한 수재들이 지방 명문고를 나와 신분상승하는 것이 하나의 출세 코스였다. 그런 명맥이 끊어진 것이 바로 평준화 이후다. 학교에서 가장 저렴하게 공부할 기회가 사라진 탓이다. 사교육의 물량 공세가 더욱 득세하는 구조다. 진보교육감들이 서울대를 없애야 공교육이 산다는 논리도 해괴하기 짝이 없다. 서울대를 없애도 최고 명문대란 간판은 다른 대학으로 옮겨갈 게 뻔하다.

용들의 전관예우 특권부터 깨야

개천의 용이 단순 신분상승을 뜻한다면 수긍할 수 있지만, ‘용’은 사라져야 마땅하다. 용은 곧 판검사나 고위 관료를 지칭한다. 고시 패스가 자타가 공인하는 용이 된 것은 평생 누릴 수 있는 면허증으로 작용하는 탓이다. 현직에서의 권력은 물론 퇴직 후에는 금전적으로도 두둑해진다. 용들의 권력에 비례해 늘어난 고시폐인이 10만명, 공시족이 30만명이다.

세월호 사태와 총리 후보자의 자진사퇴 과정에서 용들의 실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끌어주고 밀어주는 관피아, ‘5개월 16억원’의 전관예우가 바로 그것이다. 모두가 용들의 행태에 비분강개하면서 자식은 용이 되길 바란다면 모순이다. 용들의 특권부터 척결해야 한다는 게 세월호의 교훈이다.

개천의 용은 정의(定義)부터 바뀌어야 한다. 어떤 분야든지 최선을 다해 올라간 사람이 곧 개천의 용이다. 그런 점에서 40주년 홈커밍 행사 때는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출세한 용들 말고 먼저 이런 친구들부터 소개하자고. 학창시절 싸움꾼 친구가 남을 돕는 일을 하고, 도시락도 못 싸오던 친구가 사업으로 성공하고, 늘 병치레하던 친구가 몸짱이 되고, 전교 꼴찌가 교사가 된 것과 같은 이야기들을. 정말 멋진 용들이지 않은가.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