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혹한 범죄를 접하면 사형제 찬성론자가 되고 사형집행을 목격하면 폐지론자가 된다. 사형수를 다룬 영화 ‘데드 맨 워킹’을 보고나면 누구나 마음이 무겁다. 사형수로 나온 숀 펜의 신들린 연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형수의 회한과 뉘우침을 마냥 외면하기 힘들다. 영화의 실제 주인공인 헬렌 프리진 수녀의 말처럼 사형(死刑)은 정말 사법살인인가.

하지만 유영철 오원춘 고종석 등 흉악범이 등장하면 여론은 들끓는다. 최근 설문조사에서 국민 10명 중 7명(69.6%)이 사형제 존치에 찬성했다. 2000년 형사정책연구원 조사(54.3%)보다 되레 더 높아졌다. 필요악이라는 시각이다. 헌법재판소가 2008년 사형제를 합헌으로 본 이유도 필요악이었다. 10년간 사형집행을 중단해 2007년 ‘사실상 사형제 폐지국(abolitionist in practice)’ 공인을 받은 게 무색하다.

가슴은 사형유지, 머리는 폐지

공분(公憤)이 워낙 컸던 탓이다. 온·오프라인 구분없이 논란이 뜨겁다. 한쪽은 사형제 찬성 서명을 받고, 다른 쪽에선 폐지운동이 벌어진다. 대선주자들도 한 마디씩 내놨다. 박근혜 후보는 경고 차원에서 필요하다는 쪽이고, 민주당 후보들은 폐지 쪽이다. 하지만 미국과 달리 사형제가 이념의 좌우를 가르는 기준은 못 된다. 사형제 폐지법은 17대 국회 땐 정치사형수 출신인 유인태 민주당 의원이, 18대 땐 가장 오른쪽이라는 자유선진당의 박선영 의원이 냈다. 물론 표결도 못해보고 자동폐기됐다. 15대 국회부터 되풀이돼 온 일이다.

대중은 사형제를 놓고 가슴으론 유지, 머리로는 폐지 사이에서 왔다갔다 한다. 대입논술 주제로 안성맞춤이다. 타인을 죽여도 그에 상응하는 징벌이 없다면 더 크고 많은 범죄를 낳지 않을까. 흉악범에 인권 운운하며 세금으로 먹여살릴 수 있나. 반대로 생명권은 기본권의 으뜸인데 국가가 ‘눈에는 눈’식으로 단죄해도 되나. 사형제의 범죄예방 효과가 별로 없다는 분석도 많지 않은가.

철학자들도 극명하게 엇갈렸다. 루소는 사형을 “개인이 국가에 위임한 통치권의 범위를 벗어난 제도”로 봤다. 그러나 칸트는 “내일 종말이 올지라도 오늘 마지막 남은 사형수를 사형시켜야 정의로운 사회”라고 주장했다. 이 말도 맞고 저 말도 맞는 것 같다.

작년 사형집행 20개국 불과

국제적 흐름은 사형제 폐지 쪽이다.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에 따르면 사형제는 57개국만 남았다. 거의 세 배인 141개국이 폐지 또는 사실상 폐지국이다. 지난해 일본은 19년 만에 사형집행 없이 넘어갔다. 유럽에선 벨라루스 외엔 모두 사라졌다. 엠네스티가 1976년 ‘스톡홀롬 선언’을 통해 사형제 폐지를 촉구했을 당시 폐지국은 16개국에 불과했었다. 격세지감이자 상전벽해다.

전 세계 사형수는 1만8750명에 이른다. 지난해 20개국에서 676명의 사형이 집행됐다. 여기엔 수천건으로 추정되는 중국이 빠져 있다. 국가기밀이라고 공개를 거부한 탓이다. 이란은 공개된 사형만 360건이다. 북한도 공개처형 등 30건 이상이다. 이런 나라가 정상일 수 없고, 우리가 이들과 동급으로 취급받을 순 없지 않을까.

논란의 해답은 역설적으로 살인 피해자 가족들이 제시한다. 1972년 살인자에게 가족을 잃은 마리 딘스는 “복수는 해답이 아니다. 폭력을 줄이는 것이어야지 또 다른 슬픈 가족을 만들어내선 안 된다”고 했다. 사형집행은 비극의 끝이 아닌 또다른 비극의 시작이다. 사형수 가족의 눈물은 누가 닦아줄 것인가. 흉악범죄에 대한 공분을 망각하지 않는 동시에 폭력의 악순환 고리도 반드시 끊어야 한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