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연구·개발(R&D) 살림살이에 비상등이 켜졌다고 한다. 정부가 16조2000억원을 내년도 R&D 투자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해서다. 올 예산 대비 1.1% 늘어난 수준이지만,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줄어든 것이란 게 과학계의 평가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는 이달 말까지 각 부처에서 R&D 예산 요구자료를 받아 다음달까지 예산 조정을 마친 뒤 기획재정부에 넘길 예정이다.

정부는 ‘균형재정’을 말하고 있지만, ‘복지 포퓰리즘’ 예산 수요가 폭증하면서 R&D 예산이 불이익을 당하게 됐다는 점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때문에 과학비즈니스벨트, 중이온 가속기설치, 한국형 발사체 개발 등 ‘블록버스터급’ 과학 투자에 제동이 걸리게 됐다. 대학의 풀뿌리 연구를 지원하는 ‘개인 기초연구사업’의 예산도 처음으로 줄어들 것이란 소식이다.

내년 정부 R&D예산 순삭감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는 ‘스트롱코리아’(과학기술강국)의 깃발아래 정부와 민간이 R&D투자에 팔을 걷어붙인 결과로 열렸다. 지금까진 그 예산이 한국과 한국기업을 ‘패스트 팔로어’(빠른 추격자)로 만들었다면, 앞으로는 ‘퍼스트 무버’(시장개척자)로 앞서 나가기 위한 토대가 돼야 한다. 정부 R&D는 민간 부문에서 하지 못하는 장기 숙성 과제를 담당한다. 이들 분야는 10년, 20년, 30년 후의 한국호를 이끌고 나갈 엔진을 개발하는 분야로 볼 수 있다. 시간이 걸리지만 뒷날 민간이 받아먹으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걸 연구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국가 R&D는 ‘미래 복지’ 투자라고도 한다. 과학계는 예산이 줄어들 것이란 소식에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의 복지 포퓰리즘 경쟁에 밀려 미래 복지가 희생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을 내놓고 있다. 안타까운 대목이다.

물론 정부 R&D 예산을 효율적으로 운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작지 않다. 부처별로 이뤄지고 있는 각종 R&D 사업을 점검해 중복 예산을 대폭 줄여야 한다는 얘기다. 각 부처가 발주하는 방식의 R&D 예산 배분 방식을 고쳐 출연연구소 등에 권한을 넘기는 일도 서둘러야 한다. 작년에 불발한 출연연구소 통합건을 12월 대통령선거전의 회오리 바람이 불어오기 전에 마무리할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투자는 명품국가 조건

지난해 3월 국과위 출범 이후 18개 출연연구소를 단일법인으로 묶기 위한 출연연구원법 개정안을 마련했으나 국회에서 논의 한 번 못하고 폐기됐다. 가장 큰 연구소인 전자통신연구원 등이 통합 대상에서 빠진 데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한국항공우주연구원, 한국원자력연구원이 결사반대하면서 국회가 딴전을 피운 탓이다. 국가를 위해 필요한 R&D 사업을 가장 잘 아는 곳은 현장의 연구원들이다. 공무원들이 R&D 사업을 쥐락펴락하기보다는 이들에게 맡겨 R&D 효율을 높여야 한다는 점에 국회의원들이 눈을 맞춰주시길.

한국이 단군 이래 최고의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는 건 R&D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이 분야에 고급인력이 몰려 ‘몰입 연구’를 한 덕분이다. 그 역(逆)으로 R&D 예산을 줄이면, 우수 인력이 이공계를 기피하고, 그러면 ‘스트롱코리아’는 요원해진다. 한마디로 허접한 나라가 될 수 있다.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식의 복지에 돈을 쏟아부을 것인지, 미래의 한국을 먹여살릴 R&D에 쓸 것인지 지금 결정해야 한다. 강대국은 잘 참을 줄 알고, 멀리 볼 수 있는 안목이 있는 국민들에게 돌아가는 선물이다. 오피니언 리더라면 어제 미국 러시아에 이어 세 번째로 우주도킹에 성공한 이웃나라 중국을 보면서 뭔가를 느껴야 한다.

남궁덕 중기과학부장 nkdu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