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확대 정책이 경제민주화를 이루는 길이며, 미래에 대한 투자라는 주장이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총선과 대선을 의식한 정치권은 여야 할 것 없이 무상복지 확대 공약을 내놓았다.

물론 이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복지국가로 전향한 나라들이 침체의 늪에 빠져 들었고, 궤도수정을 할 수밖에 없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과잉복지로 파탄 상태에 있는 남부유럽의 사례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복지확대 정책이란 정치권과 정부가 만들어낸 재분배정책이자 보장된 복지프로그램(entitlement program)이다. 일단 시작되면 확대되게 마련이고, 되돌리기는 지극히 어렵다. 경제상황의 변동과 상관없이 부담해야 하는 고정비용이기에 급속히 고령화해 가는 우리사회에 무거운 짐을 지울 게 뻔하다.

복지국가들은 예외없이 무기력해지고 성장동력을 잃어가는 반면, 복지서비스의 품질은 급격히 나빠지는 소위 복지병을 앓는다. 미국의 유력한 대선주자인 미트 롬니의 지적을 빌리면 이렇다. ‘보장된 복지사회는 모든 사람들이 교육, 노력, 위험을 감내하려는 의사와 상관없이 같거나 비슷한 보상을 받는 사회다. 그것은 우리가 열심히 일한 결과를 다른 사람, 즉 정부가 재분배함으로써 이뤄진다. 이런 과정에서 진정한 수혜자는 정부나 정책의 입안자들이다. 진실은 모든 사람들이 복지정책으로 조금씩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전보다 나쁜 처지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복지의 이상과 현실이 이처럼 격차를 보이는 것은 사회주의 이념이 현실에서 실패하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다. 바로 개인이 선택하는 능력과 공간을 정부가 개입해 허물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은 정의와 거리가 멀고, 유능하지도 않고 책임지지도 않는 정부에 우리 살림을 맡기는 꼴이기 때문이다.

경제민주화 옹호론자들은 미국의 좌파논객인 로버트 라이시 교수가 ‘불평등은 자본주의의 실패가 아니라 이를 교정하지 못하는 정치의 실패 때문’이라는 식의 주장을 원용하기 좋아한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생산과 분배를 별개로 볼 수 있다는 고전적인 개념 혼란에서 나온다. 보장된 복지의 일방적인 확대를 거부하는 여론이 만만치 않고, 정치세력화돼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정치상황은 오히려 건강하며 실패로 보기 어렵다. 적어도 정부가 강제하는 복지확대가 정당한지를 따지고, 대안을 모색하게 만들며, 최종선택을 유권자에게 맡긴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 면에서 일시적인 다수 여론의 눈치보기에 급급해서 보편적 복지 이외의 선택을 허용치 않는 우리나라의 정치현실이야말로 정치실패로 불러야 마땅하다. 복지확대 정책을, 정당성 여부에 대한 논의를 도외시한 채, 재원확보 가능성이나 증세방안의 문제로만 밀어붙이는 것은 본말을 뒤집는 일이다.

전반적인 복지수준의 향상은 물론 바람직한 일이다. 여러 현인들이 밝혔듯이 풍요로운 사회는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는 사회이며, 그것이 바로 사회적인 복지의 향상을 이루는 길일 터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부가 거두어서 공평하게 나눠주는 식으로 해결된 적도 없고, 그렇게 돼서도 안 된다.

아무리 풍요로운 사회라도 자립할 수 없는 취약계층은 존재한다. 풍요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그런 이웃을 보살피는 능력이나 의지를 가지고 있다. 독자적인 생계유지가 어려운 장애인, 노인, 극빈자에 대한 자선이나 기부, 가정형편상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기탁과 같은 자발적 복지증진 행위가 그런 것들이다. 정치나 정부는 이런 행위가 늘어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부족분을 채워주는 일에만 주력하는 것이 옳다. 경제민주화란 거친 구호 아래 경제적 불평등을 없애려는 시도는 자발적인 복지증진 행위를 대체할 뿐 아니라, 엄청난 후유증을 남겨왔다는 경험적 사실에 보다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대홍 < 한림대 교수·경제학 dtjaang@hallym.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