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청춘의 십자로
정말이지 만들기 나름이다. 제84회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아티스트’는 “3D 시대에 흑백무성영화가 웬 말이냐”던 이들의 입을 막았다. 유성영화 등장으로 한물간 왕년의 남자스타와 떠오른 여배우의 사랑을 다룬 영화는 기술 발전에 따른 명암과 순정의 소중함이란 주제 둘을 다 잡았다.

컴퓨터그래픽으로 도배된 현란한 화면과 톱스타, 빠른 전개, 자극적인 장면이나 대사 없이도 얼마든지 관객에게 다가설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입증했다. 때론 꽉 찬 공간보다 빈 공간, 채색화보다 수묵화가 더 크고 화려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소박한 흑백영화는 화려한 경쟁작을 압도했다.

한국의 2012년 판 흑백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도 다르지 않다. 1934년 작을 복원한 만큼 화면엔 수시로 비(?)가 내리고 흐름은 끊기며 개연성까지 떨어지지만 답답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사랑에 울고 돈에 속고’ 식 신파조 내용은 은근히 정겹고, 흑백 화면은 묘한 아련함을 일으킨다.

1930년대 이 땅 도시의 생활상을 보는 즐거움도 만만치 않다. 영화 속 사채업자로 대변되는 부유층은 그 옛날에 이미 자가용을 타고 골프도 친다. 돈을 못 갚겠거든 살던 집을 비우라는 빚 독촉 행태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주유소엔 ‘가스걸’이란 이름의 여성 주유원이 있고, 카페 마담과 종업원은 담배를 피운다. 여배우의 얼굴은 둥글고 쌍꺼풀은 없다.

‘청춘의 십자로’(감독 안종화)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무성영화다. 서울역에서 수하물 운반부로 일하는 영복 등 가난한 청춘 남녀의 사랑과 고난을 다룬 멜로물. 기록만 있었으나 2007년 한 소장자가 원본 필름을 기증함으로써 실체가 드러났다.

한국영상자료원이 훼손된 부분을 제외하고 복원, 처음 상영한 것은 2008년 5월. 김태용 씨가 각본과 연출을 맡은 뒤 장면에 맞춰 새로 쓴 대본을 변사가 읽고, 박천휘 씨가 작곡한 배경음악을 피아노 바이올린 아코디언 콘트라베이스로 이뤄진 4인조 밴드가 직접 연주하고, 뮤지컬 배우 두 사람이 간간이 노래하는 독특한 형식으로 재구성됐다.

첫 상영 이후 호평을 받으면서 국내외 영화제에 초청됐고, 지난 2월 문화재 제488호로 등록됐다. 7~8일 영상자료원에서 이뤄진 상영은 문화재 지정 기념행사. 흐릿한 화면과 어설픈 맥락, 신파조 내용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건 유머감각을 덧입힌 각본과 변사(조희봉)의 적절한 애드립, 작품 전체에 생기와 현대적 느낌을 불어넣는 음악 덕이다. 옛것도 손질하기에 따라 충분히 새로운 콘텐츠로 탄생될 수 있다는 얘기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