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관점에서는 철학과 인문학의 부재도 원인입니다. "

윤대현 자살예방협회 대외협력위원장(서울대 신경정신과 교수)은 KAIST 자살사태를 이렇게 진단했다. 좋은 성적을 받는 것 외에는 자신을 '근사한 사람'이라고 느낄 수 없는 상황에서 과학수재들에게 탈출구가 없었다는 설명이다. "과학인재를 키우자는 건 좋지만 모두가 노벨상을 탈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과학적 성취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하는데…." 윤 위원장은 평소 '내 삶의 가치'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많이 할수록 극단적 선택을 피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모 대학교수도 "젊은 나이에 과도하게 특정 분야에 집중하다보니 인문적 소양이 부족하고 정서적으로 메마른 경우가 많다"며 "이럴 때 외부 압박이 과도하면 극단적 선택을 할 위험이 커진다"고 지적했다.

박보환 의원(한나라당)이 제출받은 KAIST 교양과목 리스트를 보면 이런 지적에 수긍이 간다. 한글 선택교양과목 중 어학이나 '보고서 작성법' 같은 실용과목을 빼면 말 그대로 교양과목은 10개 남짓에 불과하다. 그나마 철학 관련 과목은 전무하다. 며칠 전 KAIST 취재 때 "학교가 학생들의 정서적 빈곤을 부추긴다"고 했던 한 학생의 말이 다시 떠오른다.

이런 상황은 최근 취재했던 경희대의 교양과목 전문학부 '후마니타스 칼리지'와 비교된다. 경희대는 올해부터 모든 신입생이 이 학부 강좌 중 35학점 이상을 들어야 졸업이 가능하게 했다.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나는 여기에 왜 있는가','나는 누구이고,우리는 누구인가'.이 학부의 강좌 과목은 이처럼 '나'를 묻는 내용이 많다.

서남표 총장도 뒤늦게나마 이런 문제점을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학생들과의 간담회에서 "현재의 인문학부 역량으로는 학생들의 인문학 소양을 심어주기에 부족하다"며 "인문학부를 대대적으로 확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 학생이 "교양 과목이 너무 형식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제대로 배울 만한 것이 없다"고 지적한 데 대한 답변이었다. 각종 교양과목과 인문학 강좌가 자살 사태를 꼭 해결해 준다는 보장은 없다. KAIST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외로 작지 않은 해법이 될 수도 있다.

양병훈 지식사회부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