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출근해 노트북을 켜니 팝업 창에 '사랑은 나눔이다'라는 사내 사회봉사기금 모금 캠페인 문구가 뜬다. 올 연말은 연평도 사건과 한 · 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굵직한 정치 · 경제 이슈에 묻혀 사회봉사와 불우이웃돕기에 대한 관심이 낮아진 것 같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부정과 비리가 불거지면서 여론이 싸늘해진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세계 최고의 갑부인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와 세계적 투자자인 워런 버핏은 억만장자들을 대상으로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 운동에 동참한 억만장자 40여명이 내놓기로 한 재산은 170조원이 넘는다. 미국에서는 최고 부유층들이 앞장서 소득세 최고세율 인하와 상속세 폐지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고 한다. 부러운 풍경이다.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유럽 상류사회의 의식과 행동을 지탱해온 정신적 뿌리라고 할 수 있다. 기부 계약서에 서명하면서 한 억만장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누군가는 이를 기회,다른 누군가는 이를 책임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가진 것을 나눠주는 행위야말로 특권이며,이를 통해 기쁨을 느낀다는 자부심의 표현이다.

우리 선조들도 오랜 세월 베풂과 나눔의 정신을 지켜왔다. 서양식 복식부기보다 200년 먼저 '송도사개문서'라는 개성식 복식부기를 개발한 송도상인들은 상대적으로 영세한 보부상의 영역을 건드리지 않고 상생의 길을 열었다. 고려의 뜻있는 유신들은 조선조에 대한 저항으로 벼슬하기를 마다하고 상업에 종사하면서 선비와 협동의 정신을 근간으로 상도(商道)의 전통을 세웠다.

우리 조상들은 감을 딸 때도 까치가 먹을 만큼은 남겨 두었다.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대 · 중소기업 간 상생의 문제나 대형마트와 동네 슈퍼마켓 간의 갈등 역시 이런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규제나 법률 이전에 나눔과 배려의 정신으로 얽힌 실타래를 풀어야 할 것이다.

기부나 나눔이 반드시 금전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자신이 가진 재능이나 노력,시간을 내놓는 것도 방법이다. 장애인을 고용해 쿠키를 만드는 사회적 기업에 작은 도움이나마 드리고자 방문한 적이 있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회계와 마케팅 등 경영 전반에 대한 컨설팅을 해드렸다. 우리가 알려준 방법대로 쿠키의 원가를 계산해 적정가격을 책정한 덕에 창사 이래 처음으로 이익을 냈다는 수녀 사장님의 미소 가득한 후일담이 생생하다.

최근 들어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오지를 찾아 묵묵히 봉사를 실천하는 손길이 늘고 있다. 일제의 식민 지배와 6 · 25 한국전쟁의 상흔을 딛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고 이제는 우리보다 어려운 다른 나라를 도울 여유가 생겼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 켠이 따뜻해진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 춥다고 한다. 그래도 서울 한복판에 내걸린 '사랑의 온도계'는 우리 모두의 따뜻한 마음을 담아 눈금이 치솟길 기대해 본다.

이재술 < 딜로이트안진회계법인 대표 jaelee@deloitt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