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특파원 시절 동료들과 달리 미국차를 탔다. 육중한 차체가 주는 안정감과 뒷좌석의 푹신푹신한 쿠션이 꽤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잔고장으로 정비소를 들락거렸고 길거리에 쏟아붓듯 들어갔던 기름값에 일제차를 산 동료들이 퍽 부러웠다. '유럽차는 고급차, 일제차는 좋은차'라는 국내 소비자들의 인식 속에 왜 미국차는 설 땅이 없는지 몸으로 체험했던 시절이었다.

국내에 수입차가 급증하는데도 미국차 판매가 7304대(1~10월)에 그친 것은 그 같은 인식의 당연한 결과다. 한 · 미 양국이 자유무역협정(FTA)을 고쳐 한국으로 수입되는 미국차의 안전기준과 환경기준을 완화키로 했지만 이런 인식이 바뀌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미국의 더 많은 요구를 들어준들 과연 미국차가 잘 팔릴까. GM대우차가 많이 팔리는 것도 GM보다는 대우차 브랜드가 소비자들에게 먼저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미국이 2007년 6월 힘겹게 합의했던 FTA의 수정을 요구했을 때 얼른 수용하는 게 대승적 차원에서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미국이 쇠고기 추가 개방을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는다면 자동차 시장 개방은 원하는 대로 다 들어줘도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봤다. 더욱이 교역을 통해 성장 가도를 달려온 우리 경제의 규모를 키우고 질적 고도화를 위해서는 한 · 미 FTA를 하루빨리 발효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난 주말 발표된 추가 협상의 결과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우리차에 대한 관세 철폐가 발효 후 즉시(3000㏄ 초과는 3년)에서 4년 후로 미뤄졌다. 긴급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까지 허용했다. FTA가 지향하는 자유로운 교역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무기를 쥐어준 꼴이다. 돼지고기 관세와 복제의약품 시판에서 양보를 얻어냈다고 하지만 상호 이익의 균형을 다시 맞췄다고 보기는 어렵다. 유럽연합(EU)이 이미 합의한 협정문을 고치자고 나온다 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FTA의 골격을 완전히 뜯어고치는 내용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야당은 비준 거부 투쟁에 들어갈 태세다. 물리적 충돌은 불을 보듯 뻔하다. 쇠고기 수입 문제로 타올랐던 촛불의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눈길을 끄는 것은 국내 자동차업계의 성숙한 대응이다. 이들은 이익의 균형이 깨진 불평등 협상에 대한 불만의 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인 미국에서의 불확실성이 해소됐다며 협상 타결을 환영했다. 한국차의 미국 시장 판매 확대와 경쟁력 향상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기대감이 배어 있다. 야당은 거리로 나가기 전에 먼저 이들과 대화를 해보라.일정 수준 양보하고라도 조기 발효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자동차업계 사람들의 얘기를 진지하게 경청한다면 FTA 비준을 무조건 반대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비단 자동차 업계의 긍정적인 반응이 아니더라도 추가 협상의 손익계산서만으로 유 · 불리를 따지는 것은 곤란하다. 미국이 들이민 수정 요구엔 또다른 청구서가 붙어 있었다. 연평도가 북한의 공격을 받은 후 곧바로 서해안으로 들어온 미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가 상징하는'동맹 비용'이 바로 그것이다. 이번 협정 타결로 양국 간 안보동맹과 파트너십이 심화될 수 있다면 추가 협상의 손실을 감내해야 한다. 연평도에 날아든 청구서는 꽤 비싸기 때문이다. 외면할 수도 없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다.

고광철 논설위원 gw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