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금융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단연 돋보인 인물은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다. 그는 7000억달러 규모의 구제금융법안의 의회 통과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원의 1차 표결에서 법안이 부결되자 펠로시 의장은 "미국인들을 위해 반드시 승리해야 할 표결"이라면서 반대파 의원들을 설득했다. 결국 미 하원은 263 대 171로 법안을 통과시켰다. 붕괴 직전의 미국 금융시스템이 회생하는 순간이었다.

미 의회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어려움에 빠진 실물경제를 살리기 위한 2차 경기부양책에 대한 논의에 들어갔다. 미 의회는 대규모 인프라 투자를 중심으로 하는 경기부양 법안을 마련 중이다. 이른바 '신 뉴딜정책'이다. 의회는 1500억달러의 경기부양안을 다음 달 4일(한국시간 5일) 치러지는 대선 직후에 표결에 부칠 것으로 알려졌다. 이 또한 펠로시 의장이 주도하고 있다.

미국의 경제위기 해소를 위해 발벗고 나선 펠로시 의장은 집권당 소속이 아니다. 야당인 민주당 출신이다. 사상 초유의 국가 위기 상황 앞에 여야가 따로 없음으로 보여준 것이다. 의회의 이런 초당적 협력에 힘입어 미국 증시도 살아날 기미를 보이고 있다.

미국 경제의 위기는 남은 나라 얘기만은 아니다. 어려움에 처하기는 우리경제도 마찬가지다. 환율은 널뛰기를 계속하고 있다. 부동산은 거래자체가 끊겼고 내수는 침체일로다. 내년 경제성장률은 이명박 대통령이 약속했던 7%의 절반도 안되는 3%대로 내려앉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정부가 고심 끝에 내놓은 '국내 은행 외화표시 채무에 대한 국가보증 동의안'이나 부동산 대책은 이런 어려운 경제여건을 감안한 결과다.

정부는 22일 지급보증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이제 공은 정치권으로 넘어오게 됐다. 여야가 일단 "동의안을 조속히 처리해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한다"는 데 합의했다니 다행이다. 여야의 말대로라면 동의안 통과는 전혀 문제될 게 없다. 그래도 걱정스런 대목은 우리 정치권이 여전히 정략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야는 동의안 처리의 전제조건으로 은행권의 자구노력과 우량중소기업의 유동성 문제 해소,정부의 담보설정,부가세 인하 검토 등을 달았다. 특히 은행의 임원 이상 임금 삭감과 스톡옵션 포기,문제인사 인사조치 등도 향후 정부의 대책에 담길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해졌다. 국민의 혈세가 투입된다는 점에서 금융회사의 자구책 마련은 국회의 요구에 앞서 금융회사 스스로 취해야 할 조치이지만 여야가 '합의를 위한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여러가지 조건을 제시하는 등 정치에 치중한 느낌이 드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치권이 내건 조건들이 부적절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민의도 '그간 그들만의 축제를 즐겼던' 금융회사들에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다만 순서가 틀렸다는 얘기다. 일단 조건없이 동의해줘 금융회사들이 '급한 불은 확실히 끌 수 있도록 해주는 게 급선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금융회사들의 도덕적 해이와 다른 문제점을 철저히 따져도 늦지 않다.

국회가 앞장서 경제살리기에 나서는 미국을 따라가지는 못할 망정 위기해소에 나선 정부와 금융회사들의 발목을 잡아서는 곤란하다는 얘기다. 4류 정치라는 혹평을 듣고 있는 정치권이 이번에야말로 초당적 협력이 말뿐이 아니라는 점을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이재창 정치부 차장 leej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