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우리집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통유리를 통해 내려다 보이는 한강의 전경이다.

특히 요즘처럼 거세게 비가 내리는 날이면 유리창을 튕겨나가듯 스치는 빗방울 소리와 한강에 맞닿을 듯 내려앉은 구름 가득한 하늘이 센티멘털한 기분을 만든다.

하지만 바람과 섞인 빗소리에 눈을 떠 우울함이 그득한 하늘을 바라보며 커피 한 잔과 온 집안을 울리듯 퍼져나가는 음악 소리를 듣는 것만큼 감성을 자극하는 일은 없는 것 같다.

패션계에 종사하면서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은 최첨단 유행을 좇기에 급급하다.

시즌에 앞서 패션 트렌드를 점검하기에 늘 남보다 한발 앞서 유행 아이템으로 몸을 감싸기 일쑤며,소위 잘나간다는 카페나 레스토랑 등에 대한 정보도 남들보다 먼저 접하게 된다.

하지만 내 음악적 취향은 아직도 라디오를 끼고 살던 1980,90년대에 머물러 있다. 학창시절 내게 빼놓을 수 없는 일과는 학교 가기와 라디오 듣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소형 라디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가요와 팝송에 심취했었다. 그리고 용돈을 모아 레코드판이라도 사는 날에는 세상을 얻은 것만큼 기쁜 마음에 들떠 마루에 놓인 전축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당시 레코드판들은 재산목록 1호였다.

유행에 민감한 일상을 살다 보니 뭐 하나를 진득하게 하기가 쉽지 않은데,음악적 취향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차에서 듣는 CD와 MP3에 저장된 노래들은 학창시절 즐겨듣던 곡이 대부분이다.

오늘 아침만 해도 빗소리에 잠이 깨 튼 음악이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이었다면 너무 전형적인 것일까.

어쨌든 다른 모든 것은 최첨단에 열광하지만 음악만큼은 십년,이십년을 들어도 한번 좋았던 곡들은 질리지가 않는다. 특히나 가요의 경우 가사의 공감대를 통해 좋아하게 되는데 이럴 때는 분명 어떤 사람이나 사건과 연관되어지므로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그 사람이나,사건을 떠올리게 되면 연상 작용처럼 그 음악이 따라오는 것 같다.

내 MP3의 재생 목록에는 여러 항목이 나열돼 있다. 이 중 가장 많이 재생한 음악을 살펴보면 내가 2007년을 살고 있는지 1987년을 살고 있는지 헷갈릴 정도다. 하지만 옛 음악은 옛 친구만큼이나 내 마음을 평화롭게 하기에 누군가 내게 "이거 정윤기씨 MP3 맞으세요?"라며 의아한 눈빛을 보내도 어쩔 수 없다. 오늘 촬영이 빨리 끝나면 큰 유리를 통해 한강의 야경을 감상하며 좋아하는 노래들을 듣고 싶다. 아주 오래 전 소형 라디오를 베갯머리에 두고 듣던 그때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