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 세상이다. 휴대폰이 생긴 덕에 걸어다니면서 미국에 전화도 하고, 길이 막혀 약속시간에 늦어도 두근거리며 발 구를 일 없이 기다려 달라고 부탁할 수 있다. 문자메시지가 있으니 회의나 식사를 하면서도 소리 없는 통화가 가능하고,초상 등 급한 일이 생기는 즉시 언제 어디서건 한꺼번에 수십 수백명에게 알릴 수 있다. 인터넷에 이름만 치면 자기가 낸(낼) 세금 액수는 물론 누가 뭐하는 사람인지,어떤 음식점이 어디 있는지,새로 생긴 용어의 뜻이 뭔지는 물론 닉슨 대통령이 국무장관에게 낸 사표까지 찾아볼 수 있다. 블로그나 홈페이지 주소를 알면 누가 누구와 어떻게 소통하는지 들여다보고 심지어 대통령이 홍보수석과 주고 받는 이야기도 알게 된다. 인터넷과 휴대폰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세상은 이렇게 열린 세상이다. 예전 같으면 관련자에게 '빽'을 써야 했던 정보를 클릭 한두 번으로 알아내고,누구든 검열이나 검증 없이 자신을 나타내고 주장을 펼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 다 좋은 게 있으랴.휴대폰은 받지 않아도 좋은 연락을 꼼짝없이 받게 하고,문자메시지는 몰랐다고 잡아뗄 수 없게 만든다. 인터넷의 내용은 일단 한번 뜨면 제맘대로 복제돼 퍼지는 통에 수정하거나 삭제할 길이 없다. 또 정보의 자유로운 공개와 확산이라는 기능은 사람들을 드러내기와 훔쳐보기의 세계로 몰아넣는다. 뜨고 싶고 주목받고 싶은 사람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드러내려 안간힘을 쓰고,뭔가 훔쳐보는데서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감춰진 것을 찾아 헤맨다. 물밑 협상을 통해 이뤄져도 좋을 일들이 마구 파헤쳐짐으로써 아무도 감당할 수 없고 모두 패자가 되는 지경에 이르고,같은 내용도 부풀려지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노골적인 묘사로 각색됨으로써 관계자들에게 치유되기 힘든 상처를 입힌다. 드러내고 들추기는 쉽지만 일단 터뜨려진 일을 수습하기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많은 연인들이 미니 홈피에 애인 사진을 올리고 연애담을 털어놓다 사랑이 끝나면 지우느라 법석을 떨지만 한번 공개된 일이 잊혀지자면 시간이 걸린다. 프로필과 사진 방명록 등을 공개하던 미니홈피 주인들이 갈수록 최소한의 정보 외엔 남기지 않으려 하는 건 드러내기의 후유증을 절감한 까닭일 것이다. 무슨 일이건 만천하에 퍼뜨리지 않았으면 틀렸거나 생각을 고쳐도 잘못 알았었다,마음이 바뀌었다고 말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확성기에 대고 말하듯 죄다 터뜨려 놓으면 잘못을 인정하기도,생각의 변화를 털어놓기도 어렵다. 사랑해본 사람은 안다. 사랑한다고 소리내 말하는 순간 왠지 사랑이 식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는 걸.제아무리 존재를 알리고 인정받고 주목받고 싶어도 자신의 말과 행동이 가져올 파장을 감안해 두번쯤 더 짚어본 다음 움직였으면 싶다. 내 생각과 열정이 아무리 옳고 크다 여겨져도 어쩌면 내가 틀리거나 마음이 변할 수 있음도 고려해 한동안 가슴 속에 묻어두고 천천히 검증했으면 좋겠다. 때로는 개인도 조직도 사회도 모르는 게 약인 일이 많다. 모든 걸 까발리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그래서 비밀도 좀 있고 모르는 체 덮어두는 일도 좀 있는 그런 세상이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제발 좀 은근해졌으면!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