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와 과학은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다음주 서울에서 초연된다는 오페라 '하멜과 산홍'(최종림 대본, 프랑크 마우스 작곡) 소식은 내 머리 속에 1653년의 헨드릭 하멜과 한국의 근대과학사를 겹쳐 떠올려 준다. 네덜란드(和蘭)의 선원 하멜은 효종 4년(1653) 8월 화란동인도회사(和蘭 東印度會社)의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다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류해 들어왔다. 뱃사람 64명 중 36명이 생존했지만 조선에서의 삶은 악전고투 그것이었다.13년의 고행 끝에 하멜은 동료 7명과 함께 탈출해 화란으로 돌아갔고,'하멜 표류기'를 써서 유럽에 '코리아'를 소개했다. 한국인에게 그는 한국팀을 월드컵 4강까지 이끌었던 축구 감독 히딩크 이전의 가장 유명한 화란 사람임이 분명하다. 우리 역사에는 하멜보다 먼저 조선에 들어와 귀화해 살았던 다른 화란인 벨테브레(조선 이름 朴淵) 이야기도 있기는 하다. 1628년 역시 제주도에 표류해 들어온 벨테브레는 결혼해 살며 대포 제작을 돕기도 했고, 하멜 일행이 서울로 압송되자 통역도 했다. 아직 이렇게 귀화한 조선인 박연에게 자손이 있었는지조차 밝혀져 있지 않지만…. 소위 '지구상의 대발견'이 시작되자 서양 각국은 다투어 아시아에 진출한다. 그 앞장을 섰던 나라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도 이미 임진란(1592~1598) 때 명나라 원군(援軍)을 따라 포르투갈 잠수부가 들어왔고, 스페인 출신 가톨릭 신부는 왜군을 따라 조선에 들어와 포교(布敎)에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한국 역사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은 화란인이었고, 그것은 당시 동아시아는 이미 스페인과 포르투갈 시대를 지나 화란인들(그리고 영국인) 세상이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나가사키에 화란상관(和蘭商館)이 있어서 화란의 장사꾼들이 끊임없이 드나들며 무역을 하고 있었다. 바로 이런 관계 때문에 화란 무역센터의 의사와 지식인들은 자연스럽게 일본 청년들과 사귀었고, 거기서 17세기 이후 일본의 '화란 학문',즉 난학(蘭學)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 난학의 핵심이 바로 과학기술이었다. 1774년 일본 청년들이 스스로 익힌 화란어 실력으로 해부학 책을 일본어로 '해체신서'(解體新書)라 번역해 낸 것은 일본의 장래를 예고해 준 사건이다. 일본은 바로 이 난학의 전통 속에서 이미 18세기에 서양과학의 대강을 습득해 갔다.그리고 그것이 바탕이 돼 19세기 초부터 서양과학 배우기에 돌입했고,1868년 명치유신(明治維新)과 함께 서양의 과학기술자를 초청해 이를 정식으로 학습했으며,대규모 유학생을 유럽과 미국에 파견했다. 그 사이에 세상을 주도하는 나라는 이미 화란에서 영국으로,그리고 미국으로 바뀌고 있었다. 나가사키에는 화란 사람에 이어 영국인이,그리고 미국인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푸치니의 유명한 오페라 '나비부인'은 바로 미국의 해군장교 핑커튼과 일본 여성의 비극적 사랑을 그리고 있는데, 그것은 1859년 21살의 나이에 일본에 와서 크게 성공해 나가사키 언덕위의 멋진 집에 살았던 영국 청년 글로버를 모델로 하고 있다.'나비부인'은 화란-영국-미국으로 이어지는 나가사키 무역의 전통을 배경으로 하고 성장한 일본의 국제화 과정이 압축된 오페라다. 이번 초연되는 오페라 '하멜과 산홍'은 제주 목사의 외동딸 산홍이 하멜을 숨겨주며 사랑하게 된다는 픽션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비부인'의 두 주인공이 픽션이면서도 그 역사적 배경이 충실한 것과 달리,'하멜과 산홍'의 경우 역사적 배경이 빈약하다. 1904년 초연된 '나비부인'은 이제 꼭 1백년을 맞으며 전세계에서 수없이 공연되면서 일본 문화를 전파하고 있다.만약 '하멜과 산홍'이 성공해 세계로 진출할 수만 있다면,'나비부인'에 상당하는 한국 배경의 오페라 탄생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빈약한 역사성을 생각해볼 때 '산홍'이 '나비' 만큼 성공하기란 아주 힘들 것같다. '나비'는 이미 내 과학사 강의에 등장하는 '부교재'가 돼 있다.그러나 '산홍'은 이 강의에 활용하긴 어려울 듯하다는 뜻이다. 물론 '나비'와 '산홍'을 함께 활용하면 일본과 한국의 근대사를 비교해 보는데 도움 될 일이기는 하지만. parkstar@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