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오전 11시50분 은행회관 뱅커스클럽.최태원 SK㈜ 회장이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과의 오찬 회동을 위해 모습을 드러냈다. 약속시간보다 10분 이른 시간이었다. 두 사람간 회동 내용에 목말라 있던 기자들이 이 기회를 놓칠리 없었다. 기자들의 질문 공세가 쏟아졌다. 코너에 몰린 최 회장에게 참모들이 옆방에서 기다릴 것을 건의했지만 최 회장은 요지부동이었다.언제 강 위원장이 도착할지 모르는 시간이었던 탓이다. 약속시간인 12시. 강 위원장이 간담회장으로 들어서면서 최 회장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묘한 장면이 기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최 회장은 90도 머리숙여 깎듯이 절한 반면 강 위원장은 간단한 목례로 답했기 때문이다. 최 회장의 표정과 강 위원장의 표정 또한 대조적이었다. 최 회장은 연신 죄송하다는 듯 어색한 웃음을 지은 반면 강 위원장은 '점령군'마냥 위풍당당함 그 자체였다. VIP간 회동에 있음직한 덕담도 이날은 생략됐다. 본격 회동에 들어가기 직전 이날 회동의 의미를 설명해달라는 기자들의 주문에 강 위원장은 "시장개혁의 취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더라"고 직설법을 동원해 나란히 서있던 최 회장의 얼굴을 붉게 만들기도 했다. 강 위원장은 이어 "시장개혁 3개년 로드맵이 잘 진행되도록 협조를 '당부'하겠다"고 했고,최 회장은 "채권단과 약속한 구조조정을 착실히 이행해 나가겠다"며 '굿보이'(말 잘듣는 착한 아이) 다짐만 되풀이했다. 회동 직후 브리핑도 공정위원장의 몫이었음은 물론이다. SK측은 행여 강 위원장의 브리핑에 '누(?)'라도 될까봐 입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역대 정부 치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구호로 내세우지 않은 정부는 없다. 하지만 공정거래위원장과 대기업 총수간 역학관계가 이런 수준인 한 한국은 여전히 '기업하기 싫은 나라'에 머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김병일 산업부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