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나흘 전 첫 내각을 발표하면서 "적재적소(適材適所)를 원칙으로,변화가 필요한 부분에는 변화의 흐름을 이끌 인재를 발탁했다"고 말했다. 대대적인 '개혁 인사'가 이뤄질 것이라던 당초 예상과 달리 경제부처에 보수 성향의 관료출신을 대거 포진시킨 데 대한 배경 설명으로 읽혀졌다. 사실 경제분야에 관한 한 노 대통령에게 선택의 폭이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요즘 우리 경제는 말 그대로 사면초가(四面楚歌) 상황이다. 생산 투자 소비 등 거시경제지표가 한결같이 바닥 수준으로 내려와 있는 터에 국제 유가 급등으로 물가마저 비상이 걸렸다. 기진(氣盡)해 있는 경제에 섣불리 '개혁'의 메스를 들이대어야 할지 고민스런 상황임에 분명하다. 조각(組閣)작업 초기에 경제부총리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됐던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 등 '개혁형' 인물을 경제장관 인선에서 배제한 것은 '시장'에 대해 "안심하라"는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볼 만한 이유다. 보수성 짙은 세무관료로 잔뼈가 굵은 김진표 경제부총리를 수장(首長)으로 한 경제팀 구성에 대해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지가 "노 대통령이 안전한 선택(safe choice)을 했다"고 촌평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그러나 노동 농림 등 일부 경제관련 부처의 장관 인선을 보면 그런 해석이 전적으로 가능할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이들 부처의 신임 장관은 취임일성에서부터 '과거 행정으로부터의 개혁'을 다짐했다. 신임 노동부 장관은 "노동부는 기업이나 경제를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노동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며 노동계 권익 옹호에 충실할 것임을 강조했고,농림부 장관은 쌀 관세화 등 농업시장 개방 일정을 최대한 늦춰 농민들의 불안을 해소하겠다고 말했다. 노동시장 유연화와 국제적 흐름에 맞춘 농업시장의 단계적 개방을 추구해온 과거 정부와는 사뭇 다른 방향의 '개혁'이 추진될 것임을 예고한 셈이다. 이들 장관이 제시한 새로운 행정 방향은 노 대통령이 그간 밝혀온 정책 의지와도 맞물려 있어 더욱 주목된다. 노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양대 노총을 방문한 자리에서 "현재는 (노동계에 비해)경제계가 힘이 세지만 향후 5년 동안 이런 불균형을 시정할 것"이라고 다짐한 바 있다. 일시직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를 정규직 근무자와 같이 보장하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제도' 도입 등 핵심 현안에 대해 노동계에 '힘'을 실어주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노동계가 과연 사용자(기업)와의 관계에서 일방적 '약자'였는지도 의문이거니와,'불균형 시정'을 시장원리가 아닌 정부 개입으로 밀어붙이는 개혁이 경제에 어떤 작용을 할 것인지 등 따져봐야 할 점이 한 둘이 아니다. '농민 보호'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국가 행정의 대원칙이 돼야 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바깥의 흐름을 도외시한 무조건적인 국내시장 '사수(死守)'가 과연 농민을 보호하는 것인지는 따로 짚어봐야 할 문제다. 결과적으로 농민들에게 구조조정의 기회를 놓치게 하고,애꿎은 통신산업에 타격을 가했던 중국과의 마늘협상 파동의 교훈에 눈 감을 일이 아니다. 경제 전반에 대한 큰 그림을 먼저 그리고,그 선상에서 각 부문의 정책을 검토하는 대신 '명분론'에 내둘리는 행정은 자칫 시행착오 투성이의 '경제 실험'으로 이어질 수 있어 걱정스럽다. 월 스트리트 저널이 이번 장관 인선 내용을 보도하면서 "노무현 정부가 위기 상황에서 가파른 학습곡선을 그릴(face steep learning curves in a time of crisis) 가능성이 있다"고 꼬집은 대목을 그냥 흘려넘길 일은 아닐 것 같다.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