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의 화두가 이제 그 한도를 넘어서지는 않았는가? 경제적으로는 시장의 효율화를 위한 경쟁의 우월성을 강조했고,문화적으로는 제도적 균일화를 강조했던 그 세계화의 화두가 아직도 우리에게 유효한 것인가? 그저 모두가 '딱 한가지'최고의 수단으로 삼았던 미국중심의 세계화는 아직도 그대로 우리가 뒤따라야 할 사회발전의 모범 경로인가? 미국의 정치지도자들이 세계도처를 향해 내뱉는 얘기들을 종합하면,그들의 문화는 세계평화를 위해 오히려 경계해야만 될 것처럼 여겨질 뿐이다.다른이들과의 싸움을 풀어내려고 하기보다는,오히려 싸움을 걸기 위해 안달하는 모습을 엿보게 만든다.그들 문화권의 어느 학자는 저들과 다른 문화간의 긴장과 갈등을 문명충돌의 시작이라고 표현했지만,그의 소리는 이제 공허할 뿐이다. 충돌하고 있는 문명간의 대등성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된 채,어느 한쪽은 저들에 의해 끌려다니며 유린당하고 있다. 문명충돌의 내면 속에 숨어있는 미국의 이해관계를 세계의 정의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문명의 진화는 그들의 욕심대로 문명간의 충돌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문명간의 교접으로 완성된다. 인류 문명의 주요 현장을 두루 관찰해 보면,세계 그 어느 곳이든 독창적인 문명의 생성이 불가능했었다. 문명의 발전에 있어서 처녀생식은 불가능하다. 문명간의 교섭과 융합이 있어야 새로운 문명의 발전이 가능해진다. 어느 한 곳에서 실낱같은 문명간의 갈등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그런 갈등은 새로운 문명교섭을 위한 섞음질이었을 뿐이다. 세계 문명의 여명들이 찬란했던 그 어디든,그곳에는 문명의 충돌보다 문명의 교접이 성했었다. 한쪽이 다른 쪽을 억눌러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서로가 서로에게 변하는 문명의 접변이었다. 세계 문명의 한 축이자 인류문명의 보고라고 일컬어지는 터키 스페인 등등의 옛 이곳 저곳을 가보아도 그렇고,우리 문명의 발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들대로 대를 이어 이슬람과 기독교 문화들이 얽히고 설키었을 뿐이고,우리는 우리대로 이웃 문화들과 잇대어,서로 엉키고 엮이었을 뿐이다. 마치 기독교가 한세기 그곳에 전세를 들었다가 나가면,그 다음에는 이슬람이 세 들다 또 나간 흔적들이 한 문명의 부침과 두 문명의 치열한 교접을 말해주고 있다. 세계화가 문명의 교섭을 말하는 것이라면,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명간의 갈등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지녀야 한다. 그러려면,매일같이 이스라엘 곳곳에서 벌어지는 팔레스타인의 나홀로 단독병사의 테러를 혐오하는 그 정도로 이스라엘의 정규군이 자행하는 무차별 폭력에도 강경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테러범들이지만 저들에게는 모두가 열사들이기 때문이다.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에 경악할 수 있는 그 농도로 미국군에 자행되는 아프가니스탄의 초토화에도 반대할 수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우리 기독교문화의 이웃사촌이라면,팔레스타인 난민들 역시 우리의 이웃들이기 때문이다. 뉴욕참사에 대한 부시 대통령의 분노를 심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오사마 빈 라덴의 한 맺힌 절규 역시 정신적으로 읽어주어야 한다. 지구 이곳저곳에 벌어지고 있는 갈등과 긴장을 고려하면,우리들이 자랑하는 한 핏줄,주체의식이나 우리의 단일민족 의식도 조심스럽기만 하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그 언제나 자랑하는 선민의식 같은 것도 문화융합을 가로막는 정신적인 장애물이 될 뿐이다. 어찌보면 단일민족 그 자체가 허구이며,선민의식 그 자체가 허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선민의식이나 저런 식의 단일민족 의식들은 서로 배우며,서로 즐기며,서로 공존하는 것을 거부하기에 좋은 구실들이 되기 때문이다. 세계가 서로 살아가는 법을 알게 하려면 우리 학생들에게 다문화(多文化) 접촉경험부터 학습시켜야 한다. 미국의 서울은 워싱턴이고,아프가니스탄의 서울은 카불이라는 식의 지식정보중심 국제이해교육으로는 미흡할 뿐이다. 서로 다름을 체험하게 하고,서로 같음을 공감하게 만드는 문화체험학습은 문명교섭의 지름길이다. 다문화체험 학습을 통해 서로 경험하며 서로 느끼게 될 때,아이들은 문명간의 평화와 공존의 의미를 제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john@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