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일본총리가 '당일치기' 서울 방문을 마친 다음날 일본 유력 일간지들이 1면 주요기사로 다룬 것은 한·일정상회담이 아니었다.우여곡절 끝에 열린 정상회담 기사는 사설과 정치면 등으로 밀려났다. 대신 자위대 행동반경 확대를 위한 테러대책 특별조치법을 둘러싼 정치권의 줄다리기가 톱뉴스를 장식했다.고이즈미 총리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예의 주시한 서울 언론과 비교한다면 심드렁한 보도 태도였다. 그의 방한은 일본 언론에서도 크게 다룰 알맹이가 없는 나들이였다. 그는 '침략의 역사를 사과하고 반성한다'는 말을 남겼지만 이는 역대 총리들의 말을 되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역사왜곡 교과서,야스쿠니신사 참배,꽁치문제 등 그 어느 것에서도 명쾌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추가협의를 고위 실무자회담으로 넘겼지만'검토해보겠다'는 말로 답을 피하는 일본의 속성을 감안할 때 획기적 성과는 기대하기 힘들게 뻔하다. 그가 애용하는 표현 중 하나가 '허심탄회'이지만 마음을 비운 속얘기가 오간 흔적 또한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일본 언론은 테러전쟁에서의 공동보조와 20일의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 등 정치적 상황 변화를 양국 정상이 회담테이블에 앉게 된 배경중 하나로 꼽고 있다. 따라서 선린 이웃에 대한 배려나 꼬인 매듭을 풀려는 문제 해결의식이 서울 방문의 결정적 동기는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언론은 고이즈미 정권의 이같은 속내와 회담 결과를 읽고 있었던 셈이다. 일본 언론은 한·일관계가 살얼음판 위에서 새 출발을 시작했다면서도 한편으로는 역사체험에 얽매이지 않는 보통의 관계 설정을 주장하고 있다.국익과 주권을 당당하게 내세우라는 주문도 나오고 있다. 불쾌한 기억과 상처를 안고 있는 한국은 늘 일본의 오만과 무시가 마음에 걸린다.그러면서도 일본이 진실되고 착한 이웃으로 다가와 주길 막연히 기대한다. 그러나 한국은 이미 일본 정부와 국민의 마음에서 특별배려 대상이 아니다. 평범한 이웃일 뿐이다. 고이즈미의 방한과 언론 시각은 '약자 이웃'에 대한 국제사회의 배려가 근본적으로는 립서비스에 불과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도쿄=양승득 특파원 yangs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