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강남의 저밀도 아파트에 세들어 사는 회사원 최모씨가 걸어온 전화 목소리에는 분노가 포도처럼 영글어 있었다. 지방에 살다 새 직장이 가까운 강남 소형아파트에 전세 든지 2년.자식들 교육문제로 전세값을 올려주고서라도 살겠다고 했지만 무조건 집을 비워달라는 집주인의 성화에 전세집을 찾아나섰다. 빈집이 많았지만 허탕을 쳤다.최씨는 언제 승인이 날지도 모르는 재건축 사업승인을 하루라도 빨리 받기 위해 소유주들이 집비우기 작전에 들어갔다는 소리에 피가 거꾸로 솟구쳐 전화통에다 울분을 토해냈다. 요즘 부동산 시장에선 아슬아슬한 곡예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서울 강남의 23평형 아파트값이 재건축 기대감에 들떠 5억2천만원까지 치솟았다. 그러고도 모자라 부동산중개업자들의 아파트값 띄우기는 멈추질 않는다. 한 아파트단지에선 건설회사들이 재건축 조합의 시공사 선정 투표에서 표를 얻기 위해 1백억원에 가까운 돈을 퍼붓기도 했다. 가구당 5백만원의 돈을 뿌린 셈이다. 혼탁하기로 소문난 총선거 뺨을 치고도 남는다. 이렇게 뛴 집값과 천문학적인 비용은 결국 실수요자가 떠안게 될 짐이다. 경우에 따라선 '수건돌리기'에 재수없이 걸려든 사람이 평생 짊어지고 갈 빚이 될 수도 있다. 이 모두가 낡은 아파트를 헐고 새로 지을때 더 넓은 아파트가 생기는 프리미엄을 놓고 벌이는 머니게임의 산물이다. 문제는 아파트값이 뛰어 서민들의 내집마련 꿈을 더욱 멀어지게 만드는데 그치지 않는데 있다. 아파트값을 끌어올리기 위해 지은지 17∼18년 밖에 안된 멀쩡한 아파트도 재건축을 추진하고 나서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지은지 20년쯤 되는 아파트는 아예 유지보수를 포기해버려 슬럼화가 시작되는 '아파트의 조로현상'마저 생기고 있다. 이런 식이라면 경기도 분당 일산 평촌같은 신도시 아파트 소유자들이 앞으로 10년후 도시를 통째로 헐어내고 다시 짓겠다고 달려들 판이다. 그때면 신도시 아파트 소유주들이 서로 먼저 재건축사업승인을 받아내려고 자기네 아파트는 바닷모래를 사용해 언제 허물어질지 모른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코미디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코미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강남 재건축추진 아파트 단지에선 이렇게 끌어올린 아파트값을 유지하려고 소유주들의 담합은 기본이고 낮은 값에 아파트 매매를 성사시키는 중개업소를 '왕따'시켜 버린단다. 마치 자신의 키를 조금이라도 크게 보이려고 숨을 한껏 들이켠채 발끝으로 곧추선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는 듯 하다. 발끝을 세우긴 정부도 마찬가지다. 가라앉는 경기를 부추기기 위해 '서민주택난 해소대책'이란 포장으로 주택경기부양책을 내놓았다. 이로 인해 중소형아파트 값이 심상찮게 뛰는 부작용이 생기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문제점을 해소할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경제주체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제는 왜 아파트 재건축 기준을 건축후 20년으로 잡아야만 하는지 다시 설명해줘야 할 때가 왔다. 선진국의 아파트는 대개 내구연한을 50∼60년으로 잡고 있다고 한다. 연탄보일러 때던 개발연대의 낡은 잣대를 청정연료를 사용하는 이 시대에 들이대는 무사안일이 전세대란을 불러온 것은 아닌지 따져볼 때도 됐다. 자원도 없는 나라에서 재건축의 대안이 될 수 있는 리모델링을 활성화시키는데 주저하는 이유도 알다가 모를 일이다. 회사원 최씨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지금도 폐부를 찌른다. "적어도 의식주 가운데 서민의 먹거리와 잠자리를 놓고 장난을 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즘같아선 일찍이 현자(賢者)가 이런 백태를 보고 경고한 말을 간절히 믿고 싶다. 발 끝으로는 오래 서있지 못한다. soosu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