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늙지 않는 가상 인플루언서, ‘메타 휴먼’을 꿈꾸다
세월이 지나도 늙지 않고, 무한대의 체력을 지녔다.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를 대표하는 모델로 활동했다가, 때로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도 된다. 현재 마케팅 업계에서 가장 ‘핫’한 존재로 떠오른 버추얼(가상) 인플루언서에 대한 이야기다. 가상인간 시장은 광고계의 러브콜을 받는 ‘버추얼 인플루언서’에서 ‘메타 휴먼’으로 가기 위한 길목에 서 있다.

#1. 한국관광공사는 최근 가상인간 ‘여리지’를 명예 한국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손흥민, 있지(ITZY), 엑소(EXO) 등 스포츠 스타나 아이돌 그룹이 맡았던 자리를 가상인간이 꿰찬 것이다. 여리지는 22세 여성을 콘셉트로 탄생한 가상인간으로, 한국 문화와 관광지를 소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앞서 한국관광공사는 디오비스튜디오의 가상인간 ‘루이’를 국내 홍보 유튜브 채널의 명예 홍보대사로 임명하기도 했다.

#2. 중국의 ‘한복 공정’에 맞서 ‘우리 한복 알리기’에 나섰던 인물이 있다. 바로 가상인간 ‘리아’. 앞서 국내 연예인들이 우리 전통 의상인 한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중국인들로부터 악플 테러를 받았던 것과 달리, 가상인간은 이 같은 피해로부터 자유롭다는 장점이 있다. 가상인간을 활용한 한복 홍보가 활발해지고 있는 이유다. 버추얼 인플루언서 제작사 네오엔터디엑스는 가상인간 리아를 모델로 내세워 한복 화보와 뮤직비디오 등을 선보이는 중이다.
[special] 늙지 않는 가상 인플루언서, ‘메타 휴먼’을 꿈꾸다
국내에서 가상인간이라는 개념이 주목받는 것은 2년 전인 2020년 ‘로지’가 처음 등장했던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로지는 자신이 가상인간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등장했는데, Z세대가 선호하는 외모와 패션으로 짧은 시간 동안 인스타그램 이용자 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첫 등장 이후 몇 달이 지나서야 자신이 가상인간이라는 사실을 발표했고, 이미 로지의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는 만 단위를 넘어선 상태였다.

특히 로지는 지난해 여름 신한라이프의 출범을 알리는 CF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으로 대중의 뇌리에 자리 잡혔다. 당시 로지가 등장한 광고 영상은 공개 20일 만에 누적 조회 수 1000만 회를 달성하기도 했다. 보수적인 보험 업계에서 가상인간을 모델로 발탁한 것을 신선하게 보는 시각도 많았다. 9월 현재 로지의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는 14만6000명에 달한다. 이제 보험뿐만 아니라 자동차, 호텔, 패션, 화장품 등 다양한 영역을 종횡무진 누빈다. 연간 광고료는 올해 초 기준 3억 원 수준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연간 수익은 15억 원 이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로지의 성공 덕분일까. 가상인간을 만들어내는 기업들의 움직임도 더욱 분주해지는 분위기다. 신세계그룹은 지난 8월 가상인간 ‘와이티(YT)’를 프로야구 경기에 시구자로 내보냈다. 마운드가 아닌 대형 전광판에서 공을 던지는 모습을 보여주며 본격적인 활동의 신호탄을 쐈다. 신세계그룹이 선보인 와이티는 그래픽 전문 기업 펄스나인과 함께 만든 가상인간으로, ‘영원한 스무 살(young twenty)’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에 앞서 신세계의 ‘유통 맞수’인 롯데 쪽에서 탄생한 가상인간도 있다. 롯데홈쇼핑이 자체 개발한 가상인간 ‘루시’다. 루시는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29세 모델 겸 디자인 연구원이라는 콘셉트로 개발됐다. 최근 롯데홈쇼핑 방송에 쇼호스트로 등장해 간단한 상품 소개를 맡기도 했다. 아직 쌍방향 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기술이 발전되지는 않은 상태지만, 향후 가상 쇼호스트가 시청자들과 실시간 소통할 수 있는 방향으로 기술을 고도화하겠다는 게 롯데홈쇼핑의 포부다.

최근 몇 년 사이 가상인간 마케팅이 인기를 끄는 트렌드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다. 미국 디지털 캐릭터 제작 업체인 브루드가 2016년 4월 출시한 버추얼 인플루언서 ‘릴 미켈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가상인간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거주하는 19세 브라질계 미국인 소녀 캐릭터로 설정돼 명품 브랜드 모델로 활동해 왔다. 2020년 연간 한 해 동안 벌어들인 수익은 130억 원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되며,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는 304만 명이다.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인터넷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25인’에도 포함됐다.

영국 사진작가이자 컴퓨터그래픽 아티스트인 카메론 제임스 윌슨이 제작한 ‘슈두’도 화제에 오른 가상인간이다. 남아프리카 출신의 가상 패션모델 콘셉트로 만들어졌으며, ‘최초의 디지털 모델’이라는 수식어를 지녔다. 중국에서는 가상인간 ‘키코’가 라이브 방송을 진행해 누적 시청인원 19만 명을 넘어선 사례가 있다.
신세계그룹이 지난 8월 선보인 가상인간 ‘와이티’. 사진=신세계그룹
신세계그룹이 지난 8월 선보인 가상인간 ‘와이티’. 사진=신세계그룹
기업들이 실존 연예인이 아닌 가상인간을 모델로 기용하는 배경에는 자사의 브랜드 이미지에 ‘맞춤형’으로 활용하기 용이하다는 이유가 존재한다. 실존 모델에 비해 스캔들이 생길 위험이 적고, 촬영 시간과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으로 꼽힌다. 실존 인물과 달리 콘셉트 방향의 제약 없이 자유롭게 브랜딩할 수 있다는 면도 장점이다.

경우에 따라 광고 비용 절감을 꾀하는 것도 가능하다. 통상 개발 초기 단계에는 수억 원의 개발 비용을 쏟아야 하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활동하는 아이돌 등에 지불하는 광고 단가와 비교하면 오히려 저렴한 비용으로 마케팅할 수 있다.

이런 흐름에 따라 향후 글로벌 가상인간 시장의 성장세도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시장 마케팅 분석 회사 하이프오디터에 따르면 버추얼 인플루언서 마케팅 시장 규모는 2020년 2조4000억 원에서 2025년 14조 원으로 5.8배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버추얼 인플루언서를 넘어 전체 가상인간 시장의 성장세는 더 가파를 전망이다. 시장조사 업체 이머전리서치에 따르면 글로벌 가상인간 시장 규모는 2020년 13조 원에서 2030년 680조 원으로 50배 이상 성장할 것으로 예상됐다.
롯데홈쇼핑 가상인간 '루시'. 사진=롯데홈쇼핑
롯데홈쇼핑 가상인간 '루시'. 사진=롯데홈쇼핑
친구처럼 양방향 소통하는 ‘메타 휴먼’ 시대 오나
업계에서는 가상인간 시장을 아직 초기 단계로 보고 있다. 국내에서 버추얼 인플루언서가 유행하고 있지만, 완전한 가상인간을 구현했다기보다는 인간과 흡사한 캐릭터를 만든 쪽에 가깝기 때문이다. 현재 대부분의 가상인간 제작 방식은 컴퓨터그래픽스(CG)와 실사 모델을 바탕으로 가상인간의 모습을 만들고, 거기에 성격과 배경, 직업 등의 콘셉트를 부여하는 식이다.

특히 1998년 ‘세상엔 없는 사랑’이라는 노래로 데뷔해 20만 장의 앨범 판매고를 올렸던 사이버 가수 아담과 자주 비교된다. 20년 전에 비해 그래픽 기술 등이 크게 발달한 만큼 인간과 거의 흡사한 수준의 캐릭터 구현이 가능해졌지만, 근본적인 정체성 면에서는 아담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게 한계점으로 지적된다. 결국 가상인간이 아담처럼 한때 유행으로 반짝 떴다가 사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인공지능(AI)이 적용된 ‘메타 휴먼’으로의 발전이 핵심이다.

곽호인 삼성증권 연구원은 “디지털 휴먼에 AI가 본격적으로 적용되면 버추얼 인플루언서를 넘어 버추얼 어시스턴트(일상에서 사람을 돕는 CS 서비스), 인텔리전트 어시스턴트(사람처럼 행동하고 대화하는 가상인간), 컴패니언 단계(인간과 구분이 되지 않는 AI)로 본격 확장된다”며 “인텔리전트 어시스턴트와 컴패니언 단계는 메타 휴먼이라고 부를 수 있다. 메타버스에서 살아 숨쉬는 가상의 인격체가 될 수 있는 단계다. 메타버스에 접속한 사람과 실시간으로 맞춤형 대화를 진행할 수 있으며, 다양한 상황과 훈련에서 코칭할 수 있는 디지털 휴먼”이라고 설명했다.

예컨대 최근 유행하는 버추얼 인플루언서의 비주얼에 2020년 12월 말 소개된 ‘이루다’ AI 챗봇 서비스가 합쳐진 형태를 상상해볼 수 있다. 이루다는 친구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관계를 쌓을 수 있는 AI 챗봇이다.

딥페이크·혐오부터 외모지상주의까지…
가상인간 둘러싼 윤리적 이슈 ‘논란’

다만 이루다 서비스의 경우 가상인간이 메타 휴먼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윤리적 이슈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 단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이루다 서비스는 당시 무분별한 데이터 학습으로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차별·혐오적 발언을 쏟아내며 AI 윤리 논란을 일으켰는데, 이 이슈를 계기로 사회적 공분을 샀던 게 서비스 종료의 큰 원인이 됐다.

가상인간을 둘러싼 윤리적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가상인간의 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해 사기 등 범죄 행위가 일어날 수 있는 한편, 가상인간이 성희롱, 명예훼손 등 범죄 대상이 되는 경우도 생겨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고인의 생전 모습을 되살리거나 실존 인물을 가상인간으로 재탄생시키는 과정에서 인격권을 침해하는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외모지상주의와 성별 편견을 강화한다는 점은 국내 가상인간 시장이 지닌 한계점으로 꼽힌다. 미국 CNN은 최근 한국에서 루시, 로지 등 버추얼 인플루언서가 인기를 끄는 현상을 소개하고, ‘완벽하게 아름다운 가상인간’이 비현실적인 미적 기준을 향한 강박 관념을 부추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 가상인간 업체 제작자는 “클라이언트들이 가상인간 제작을 의뢰할 때 20대 극초반의 어린 여성 캐릭터를 원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며 “현재 활동하는 가상인간의 경향성만 봐도 알 수 있듯, 젊고 아름다운 외모의 유명인을 소비하고자 하는 대중의 니즈가 가상인간 시장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글 정초원 기자 cc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