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화두는 역시 ‘융합’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결합하고, 기계와 인간, 현실과 가상세계가 공존하는 시대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가교가 되기도 한다. 비주얼 아티스트 리노(35, 김현중)의 예술철학도 이와 결이 같아 보였다. 그가 창작한 캘리그라피(calligraphy), 사진, 그림, 동영상 등 작품 대다수가 디지털로 완성됐지만, 그 면면에는 아날로그 정서가 짙게 묻어났다. 누구보다 한글의 조형미와 사람, 그리고 기록을 사랑하는 다재다능한 청년 예술가, 리노를 소개한다.
비주얼아티스트 리노 "비주얼 아트는 미완의 일기죠"
어떤 사람을 자세히 알고 싶으면 그의 공간에 단서가 있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 위치한 비주얼 아티스트 리노의 작업실이 그랬다. 건물 외관과 시설은 오래됐지만, 리노의 공간엔 그가 사랑하는 것들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했다. 다양한 붓과 펜, 물감, 엽서, 향초들이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줄줄이 놓여 있는 카메라와 컴퓨터, 3차원(3D)·가상현실(VR) 디바이스들은 디지털 시대의 단면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 이질적인 구도 속에서 리노의 공간은 오묘한 균형미가 느껴졌는데 그 배경에는 그만의 예술철학과 작품이 뒷받침됐다.

아직 대중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지만, 리노는 국내 캘리그라피 영역에서는 유명인사이자, 국내에 처음으로 ‘디지털 캘리그라피’를 선보인 아티스트다. 2009년 군복무 시절 우연히 자신의 글씨체를 본 선임의 소개로 캘리그라피 세계에 입문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국내엔 캘리그라피라는 용어조차 생소했지만 리노는 이 분야에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태생적으로 ‘기록하기’를 좋아하고, 무언가 아름답게 꾸미거나 표현하길 좋아했던 그는 한글의 미를 독자적인 시각으로 풀어내고 싶었다. 그저 상업적인 목적만이 아닌, 예술 그 자체로의 캘리그라피를 원했던 그는 2014년 인생의 스승이자 동료인, 정통 서예가 출신의 오민준 작가를 만나 작품 활동에 매진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최근 10여 년간 그의 필모그래피만 봐도 치열했던 노력이 그대로 감지된다. 2014년 어울림주최 ‘한글일일달력전 2014’를 필두로 매해 수십 개가 넘는 국내외 캘리그라피 전시전과 행사, 강의, 실무디자인 작업을 진행했다.

우선 소아청소년 염증성 장질환 환우들을 위한 캘리그라피 행사(2016년), 전태일 열사 동상 캘리그라피 작업(2017년), 6·25 한국전쟁 기념 추모전시 ‘임을 잊지 않겠습니다’(2018년), 유관순 열사 순국 100주년 기념 ‘추모의 시, 캘리그라피를 만나다’(2020년) 등 공익 목적의 전시, 행사, 실무디자인 작업이 있다. 또한 폭스바겐 ‘헬로(hello) 2018’ 디지털 캘리그라피 행사(2018년), 루이 비통 밸런타인데이 캘리그라피 행사(2019년), 영화 <로켓맨> 개봉 기념 포스터 제작(2020년) 외에도 2015년엔 CJ그룹, SK 임직원 등을 대상으로 캘리그라피 강의를 진행하기도 했고, 2018년부터는 클래스101을 비롯해 다양한 플랫폼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수강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무엇보다 비주얼 아티스트로서 리노가 주목받는 건, 그의 도전적인 예술적 융합 시도에 있다. 그는 캘리그라피 외에도 사진과 이미지 창작은 물론이고, 이것들을 한데 섞기도 하고, 나아가 모든 작업을 직접 디지털로 구현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다가올 미래엔 VR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예술 세계를 감상하길 꿈꾼다는 리노의 이야길 들어봤다.
비주얼아티스트 리노 "비주얼 아트는 미완의 일기죠"
어린시절부터 비주얼 아티스트가 꿈이었나요.
“아니요. 원래 제 꿈은 신부님이었습니다. 제 작가명 ‘리노’도 세례명이에요. 누구보다 그 꿈을 이루고 싶어서 중학교 때부터 5년간 공부를 했는데, 굴곡진 가족사로 인해서 대입을 앞두고 꿈을 접어야 했어요. 그나마 당시에 심리학과 사회복지에 관심이 있어서 가톨릭대 성심교정에서 사회복지학과를 전공하고 2013년부터 1년 반 정도 사회복지사로 일하기도 했어요.”

그럼 캘리그라피는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2013년 전후로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참 많았어요. 우선 2012년 어머님이 돌아가셨어요. 일찍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편모 가정에서 자란 제게 어머님의 부재는 여러모로 시린 현실이었습니다. 또한 사회복지사로 활동할 당시, 주로 어르신들을 돌보는 업무를 많이 했는데 그 과정에서 부딪치는 일들이 적지 않았어요. 정말 너무 힘들었던 시기였죠. 그때 제게 위로가 돼준 게 캘리그라피였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저는 기록하고, 무언가 아름답게 꾸미거나 표현하는 걸 즐기는 아이였어요.

대개 남자 아이들은 즐기지 않는 다이어리 꾸미기도 좋아했고, (이혼 전) 부모님 모두 디자인 관련 일을 하셨던 터라 집에는 늘 각양각색의 디자인 도구들과 카메라, 사진들이 많았어요. 그것들을 자유롭게 가지고 놀기도 했고, 일주일에 한 번씩 아버지가 사주신 레고를 조립하면서 공간 꾸미기에 대한 식견도 넓히게 됐던 것 같아요. 이런 제 습관이 군대에서도 이어졌는데, 어느 날 제 글씨를 본 선임이 ‘너 글씨 참 잘 쓴다’며 캘리그라피를 소개해주셨어요. 이후 제대하고 본격적으로 캘리그라피를 배우기 시작했죠. 그러던 중 2014년부터 우리나라 1세대 캘리그라피 아티스트 오민준 작가님을 만나서 제 예술 세계를 확장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비주얼아티스트 리노 "비주얼 아트는 미완의 일기죠"
오 작가님을 만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캘리그라피를 배우다 보니 이걸 단순히 상업용으로만 활용하기보다는 뭐랄까, 나만의 미학을 더하고 싶은 예술적 욕구가 커지더라고요. 그 갈증의 끝에서 오 작가님을 만나게 됐고, 그분을 통해 정말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오 작가님은 제게 스승과 제자 관계보다는 예술을 하는 동료로서 대우하셨죠. 또한 정통 서예를 전공하셨음에도 그분은 제게 어떠한 경계를 제시하지 않으셨어요. 사실 제가 국내 최초로 디지털 캘리그라피를 한다고 했을 때 적잖이 색안경을 끼고 보는 분들도 많았거든요. 하지만 선생님은 그런 제 행보를 지지해주셨고, 되레 ‘할 거면 제대로 파고들라’고 조언해주셨죠.”
비주얼아티스트 리노 "비주얼 아트는 미완의 일기죠"
작품에 디지털 작업을 시작한 이유는요.
“앞서 언급했듯 저는 글씨든, 사진이든, 이미지든 무언가를 기록하고, 그걸 아름답게 꾸미는 작업을 좋아해요. 그러다 보니 그것들을 자연스럽게 결합하게 됐고, 그 과정에서 아이패드를 접하게 됐죠. 사실 제가 작품 활동을 시작할 당시엔 아이패드가 없었어요. 그땐 사진을 찍으면 일일이 스캔을 받아서 글씨만 떼내고, 그걸 다시 포토샵에 옮겨서 합성 작업까지 해야 했어요. 굉장히 손이 많이 가는 복잡한 과정이었죠. 그런데 아이패드가 등장하면서 이런 과정들이 상당히 간소화됐고, 작품을 완성하는 데 속도가 났죠. 시작은 이처럼 편의성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죠.”


무엇이죠.
“저는 원래 아날로그를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제 작품들 대개 그러한 정서가 깔려 있죠. 전 아직도 붓이나 펜 등등 아날로그 도구들을 많이 활용하고, 사진도 필름카메라 질감을 더 선호해요. 하지만 예술을 보는 관점이나 도구도 시대가 흐르면서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가령, 시대가 변하면서 사람들이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감상은 달라지기 마련이거든요. 그런 변화에 따라 저는 그것을 표현하는 툴(tool)이 바뀌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세상은 현실과 가상의 공존이 필연적인데 예술을 만들고, 감상하는 수단도 변해야죠. 기존의 것에 머물지 않고 남들이 하지 않았던 것들을 고민하고, 구별되는 작업에 도전하는 자세나 호기심이 예술가로서 제 신념이자 에너지의 근원이 아닐까 싶어요.”

작품들 상당수가 유독 외로움, 공허에 관해 이야기해요. 시대상의 표현인가요.
“저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람이고 시대적인 자화상을 담는다기보다는 온전히 제 경험을 이야기해요. 사람들이 종종 물어요. ‘리노라는 사람의 감성은 어디서 나오나요’라고요. 그때마다 저는 제 안에 있는 우울함에서 나온다고 얘기를 해요. 사실 제 인생을 돌이켜보면 마냥 행복한 인생은 아니었거든요. 그나마 다행히도 인생의 힘든 고비마다 제 주변에서 좋은 분들이 저를 이끌어주셨고, 그들과 교류하면서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작품 근간에는 제 안의 외로움이 담겨 있지만 동시에 그것들을 저만의 긍정적인 시선으로 밝게 표현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에 사람들이 공감해주는 기분은 어떤가요.
“사람들이 제 작품에 공감해주는 순간이야말로 행복하죠. 보태어 말씀드리자면 일각에서는 현대 예술이 지나치게 상업화되고, 하향 평준화된다고 지적하기도 해요. 그런데 제가 생각하는 예술의 본질 중 하나는 예술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고귀한 것보다 사람들 속에, 우리 일상 속에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이걸 바라보는 시각 차이는 당연히 존재하겠죠. 사실 딱 하나의 정답은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하고자 하는 예술은 그것을 통해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고, 곁에서 그것이 항상 존재할 수 있어야 더 가치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늘 작품을 구상할 때 제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이게 남들에게도 공감이 될 수 있는 감정일지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편입니다.”

요즘에는 무엇에 가장 관심을 두시나요.
“하루종일 공부하고 만져보고 몰두하는 게 3D 작업이에요. 디지털 디바이스를 활용해 3D 환경을 만들어보고 가상공간을 구현해보죠. 또 그걸 어떻게 내 작품으로 녹여낼 수 있을까 늘 고민해요.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작업을 하면 할수록 더 어려운 작업을 찾고 있달까요. 혼자서 3D 관련 모든 작업을 다 해보고 싶거든요. 사실 과거에는 일반 개인이 이 작업을 해본다는 건 꿈같은 일이었어요. 기업에서만 만질 수 있는 값비싼 툴이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누구나 해보고자 하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넘쳐나는 세상이에요. 저는 이런 다양한 도구들을 모두 활용해보고 싶고, 그걸 제 작품에 적용하고 싶어요. 그래서 궁극에는 제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환경, 혹은 세상을 가상세계에서 구현해보고 싶고요.”
비주얼아티스트 리노 "비주얼 아트는 미완의 일기죠"
캘리그라피와 함께 일반인 화보도 찍고 있는데 선별 기준이 있나요.
“제 인생을 구성하는 가장 큰 두 가지를 꼽자면 있다면 기록과 좋은 사람들이에요. 특히, 사람들을 통해 좋은 에너지와 영감을 받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그분들을 어떠한 방식이로든 기록하고 싶었죠. 특별한 선별 기준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전 약간 모든 게 갖춰진 모델들을 찍는 걸 즐기지 않아요. 그런 분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이 예쁘게, 혹은 멋있게 나올지 알기 때문에 제가 되레 셔터맨이 된 기분이거든요. 하지만 이런 촬영 작업이 익숙하지 않은 분들의 미숙함이 제게는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는 자양분이 돼요. 무엇보다 끊임없이 서로 대화하고 조율하면서 무언가 함께 만들어 가는 과정이 무척 재미있고, 큰 의미를 주죠.”

K-아트가 국내외적으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아직도 열악한 면이 많죠. 어떤가요.
“한국의 비주얼 아티스트들이 전 세계적으로 그 진가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우리나라 영상 제작자들의 경우에는 세계 곳곳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고, 한국 아티스트들의 제작 스타일을 배우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고무적인 일이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국내 예술 기반이 그리 탄탄하지만은 않은 것도 현실이에요. 특히 캘리그라피 분야는 더욱 그렇죠. 저는 일본을 찬양하는 사람은 결코 아니지만, 일본의 캘리그라피 입지는 우리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 캘리그라피를 우리말로 풀이하면 ‘서예(書藝)’거든요. 그걸 중국에서는 서법(書法)이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서도(書道)라고 씁니다. 이 중 서양 사람들에게 아시아 캘리그라피에 대해 물어보면 답변은 대개 하나입니다. ‘쇼도(書道·しょどう)’라고 답해요.

일 때문에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보면 일본은 아직도 간판들 대부분이 다 고유의 손 글씨로 제작하고, 자국 글씨를 세계적으로 알리는데도 국가적으로 공을 들였어요. 실제로 1970~1980년대 일본 서도 작가들이 유럽에 많이 진출하기도 했고요. 저는 우리나라도 서예는 물론이고, 예술 전반에 전폭적인 투자가 이뤄지길 바라요. 동시에 옛것과 새것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좋은 멘토가 되주기만 해도 더 좋은 결과물들이 나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비주얼 아트란.
“미완의 일기입니다. 아직도 기록 중이고, 죽을 때까지도 완성되지는 못할 것 같은 일기죠. 언젠가 이제는 더 이상 쓸 말이 없다고 여겨질 때까지 계속 기록하는 게 제 목표예요.”

글 김수정 기자 |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