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가 빠르게 고령화 시대로 진입하면서 은퇴 후 자산관리 및 생애주기별 재무 설계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지난해 통계청은 국내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16%를 넘었다고 발표했다. 보건의료 기술의 발달로 평균수명이 연장되면서 2025년에는 노인 인구가 20%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희망친구 기아대책, 노인 심리적·정서적 안정 돕다
[사진제공 기아대책]하지만 아직까지 노년기 심리‧정서적 안정에 대한 중요성에 공감하는 움직임은 더딘 것이 현실이다. 올해 3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행한 ‘노인의 정신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 관한 연구: 가구 특성 간 비교를 중심으로’ 논문에 따르면 산업구조 변화에 따른 핵가족 문화가 사회 전반에 자리 잡으며 가족과 공동체에서 배제되고 소외되는 고령자들이 늘고 있다. 이들은 은퇴 후 직면하게 되는 사회적 역할 상실, 본인과 배우자 사망에 대한 불안 등을 느끼며 다른 계층에 비해 심리‧정서적으로 훨씬 취약한 환경에 노출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코로나19 장기화도 노인의 정신건강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오대종 서울 보라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와 김기웅 분당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연구팀의 추적 연구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노년기 우울증의 발병 위험은 코로나19 전보다 2.4배 올랐다. 오대종 교수는 “정신건강이 취약한 노년층을 위한 사회적지지 체계 강화와 심리 지원 확대가 필요하다”며 노년기 정신건강 증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고령층 심리‧정서적 건강 증진은 국가적 과제…정부가 주도

이미 해외에서는 고령층의 심리·정서를 돌보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도입하고 있다. 일본은 올해부터 노년층의 정신건강 회복을 위해 지방자치단체가 보호하고 있는 유기견과 유기묘 등을 요양원으로 보내는 ‘애니멀 테라피’를 시행 중이다. ‘테라피 독’과 ‘테라피 캣’으로 노인들의 심리 치료 효과를 높이며 지역 내 유기 동물 이슈도 해소할 수 있어 사회적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방안으로 각광받고 있다.

독일은 2020년 7월부터 연방정부가 나서 ‘서로 함께 서로를 위해(Miteinander-Füreinander)’라는 시니어 지원 프로젝트를 전개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가족이나 친구와 교류가 어려워진 노인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지역별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사회활동에 참여하도록 격려하고 지원하며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우리나라도 급속한 인구 고령화에 따른 노인 빈곤율 및 독거노인 문제 등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 2021년 ‘제2차 정신건강복지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코로나19 장기화로 국민의 정신건강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높아진 데 따른 조치다. 2025년까지 5년간 총 2조 원을 투입해 전국 14곳에 ‘권역별 정신응급의료센터’ 거점을 마련하고 노인과 장애인 등 고위험군을 발굴해 지원책을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노년기 긍정적 ‘자기인식’ 도와 심리‧정서적 안정 도모

민간 분야에서도 사회적 고립과 우울증 발병 위험이 높은 노년층을 위한 프로젝트를 실시 중이다. 국내 최초의 국제구호개발 비정부기구(NGO) 희망친구 기아대책은 지난해 9월부터 올해 5월까지 65세 이상 어르신 80명을 대상으로 ‘고귀한 삶을 나누다’ 사업을 실시했다.

이번 사업은 노인의 생애가치 설계 및 심리‧정서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나이 듦에 대한 긍정적 ‘자기인식(연령정체성 인식)’을 하도록 도와 노년기에 직면하게 되는 다양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것을 핵심 목표로 설정했다. 하나금융그룹의 후원과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지원으로 진행된 ‘고귀한 삶을 나누다’ 사업은 크게 △포토 자서전 작성 △생애가치 설계 및 나눔 컨설팅 등의 조별 활동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포토 자서전은 참여자들이 자서전을 작성하면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던 사진들을 정리하고 다른 참가자들과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하며 현재의 모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수용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참가자들은 자서전 한켠에 ‘미니 유언장’도 남겨 인생을 되돌아보며 여생을 새롭게 계획하기도 했다.
희망친구 기아대책, 노인 심리적·정서적 안정 돕다
희망친구 기아대책, 노인 심리적·정서적 안정 돕다
[김옥련 씨 모습. 사진제공 기아대책]

프로그램에 참여한 김옥련(72) 씨는 “생애 처음 유언장을 작성하면서 자녀들과 그동안 하지 못했던 깊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며 “자연스럽게 유산 이야기도 나오게 됐는데, 자녀들이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하고 지지하겠다는 이야기를 해주니 그저 고마웠다. 자녀들에게 존경받는 것 자체로 내 인생이 행복하고 값지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생애가치 설계 및 나눔 컨설팅은 노인들이 인생에 가치를 부여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동기를 심어주는 것을 목표로 진행됐다. 하나은행과 희망친구 기아대책이 지난해부터 시행하고 있는 유언장 작성 캠페인을 소개하고 기아대책의 유산 기부 프로그램 ‘헤리티지 클럽’ 강의를 통해 나눔 문화 확산의 중요성에 공감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한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면서 남은 인생을 윤택하게 보낼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 계획을 세우도록 도와 참가자들의 심리‧정서적 안정감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실제로 참가자 대상 설문조사 결과 참가자들은 프로그램을 통해 △긍정적 자기인식 △삶의 태도 변화 및 계획 수립 △봉사활동 참여 의지 등 모든 항목에서 인식을 긍정적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고 답했다.

‘고귀한 삶을 나누다
프로그램의 참여자 대표 김옥련 씨는 “평소 코로나19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며 신체적, 정서적으로 심한 무력감을 느끼던 시기가 있었다”며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고민이 깊어질 즈음 희망친구 기아대책의 ‘자서전 프로그램’을 접하게 됐다. 사람들도 만나고 다양한 활동들도 있을 것 같아 기대감을 갖고 프로그램을 시작했던 것 같다”고 사업에 참여하게 된 계기를 소개했다.
이어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포토 자서전 만들기’였다. 자서전을 만들면서 오랫동안 장롱 속에 넣어뒀던 사진첩에서 한국전쟁 통에서도 김밥 장사를 하시며 자식들을 키워내신 부모님의 모습을 다시 마주하게 됐다. 사진 속 부모님은 덥수룩한 머리에 너저분한 옷차림이었지만 세상 누구보다 든든했던 존재였고 지금도 나에겐 자랑스러우신 분들이다”라며 “어려운 시절 속에서도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지혜로 우리를 키워내신 어른들이 있었기에 우리 세대도 수많은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DNA에 새길 수 있었지 않나 싶다. 이번 기회를 통해 내가 갖고 있는 삶의 지혜를 미래 세대에게 전달하는 등 내가 수행할 수 있는 사회적 역할을 다시 찾아 나서고자 하는 의지가 생겼다”며 프로그램 참여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김 씨는 “물질적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시점에서, 젊은 세대가 앞으로 겪게 될 다양한 상황들에 대해 지혜롭게 대처하며 삶의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전하고 싶다”며 “대나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마디마디를 쌓아 올리며 단단해지는 것처럼, 미래의 세대 역시 삶 속에서 마주하는 고난을 잘 견뎌내어 더욱 성숙하고 건강한 인생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고 말했다.

함현석 희망친구 기아대책 CSR본부장은 “희망친구 기아대책은 소외된 이웃의 육체적 굶주림뿐 아니라 정신적 빈곤 해소를 위해서 다방면으로 노력을 하고 있다”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고령층의 정신건강 문제를 전문가들과 함께 살피며 개선해 나갈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이를 통해 우리 모두가 개인과 가족 및 사회 안에서 역할을 발견하고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김수정 기자 hoho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