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tty Images 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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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촬영 후 1주일쯤 뒤에 말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 사고를 방지하지 못하고 불행한 일이 벌어진 점에 대해 시청자분들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지난 1월 20일 KBS는 시청자에게 사과문을 발표했다. 당시 방영 중이던 대하사극의 낙마 장면을 촬영하던 도중 말이 넘어져 죽자 동물학대 비판이 거세게 일어난 직후였다. 이 사고는 근래 반려동물 등에 관한 ‘동물권’ 인식 확산 바람을 타고 우리 사회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사전적으론 ‘사람의 죽음’을 뜻하는 말

우리말 관점에서도 눈에 띄는 곳이 있다. ‘사망’의 용법과 관련해서다. ‘말이 사망했다’는 왠지 어색하다. 사고 소식을 전한 언론보도에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말 스스로 일어났지만, 사망” “낙마사고 촬영 1주일 뒤 말 사망 확인”처럼 ‘사망’을 쓴 게 많았지만, “촬영 위해 넘어뜨린 말, 1주일 뒤 죽었다” “‘태종 이방원’ 말 죽음 사고…” 식으로 표현한 것도 많았다. 말의 ‘사망’과 ‘죽음’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사전적으로 사망은 ‘사람의 죽음’을 뜻한다. 우리 인식에 소 돼지 등 짐승의 죽음을 ‘사망’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배우고 써왔다. ‘말 사망’에서 오는 어색함은 그런 학습효과에서 연유하는 것 같다. 말을 아는 것과 올바로 구사할 줄 아는 것은 다른 얘기다. ‘사망’이란 말은 누구나 알지만, 그 대상이 사람에 한정돼 쓰인다는 점은 종종 간과한다.

용법을 알아야 말을 정확히 쓸 수 있다. 글쓰기에서 이게 왜 중요하냐면 ‘글의 자연스러움’을 결정하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글은 물 흐르듯 매끄럽게 이어져야 한다. 용법을 거스르면 읽을 때 어색해져 흐름이 막힌다. 한마디로 세련되지 못한 글이 되고 만다. 문맥에 따라 ‘사망’ 대신 ‘죽음’을 쓰는 게 대안이다. ‘죽음’은 생물의 생명이 없어지는 현상을 이른다. 사람에든 짐승에든 두루 쓸 수 있다.

또 다른 관점이 있다. 시대가 바뀌어 ‘사망’이란 단어도 진화 중이다. ‘동물권’이란 말이 비교적 새로 등장했듯이 ‘사망’의 의미 대상도 확장 중이다. ‘반려동물 사망신고’니, ‘등록동물의 사망’이니 하는 식으로 행정용어가 쓰여 자연스럽게 입에 오르내린다. 그러니 무조건 잘못 썼다고 탓할 수도 없는 일이다. 다만 ‘사망’ 범주에 짐승도 포함하게끔 사전 풀이를 바꿔야 국어 사용에 혼란이 생기지 않는다. 물론 쉬운 게 아니다. 지역 간, 세대 간, 계층 간 단어 용법에 대한 합의가 이뤄질 때 가능한 일이다.

‘서식지’도 동물에서 동식물로 용법 확장

‘사망’ 용법의 혼란은 앞서 비슷한 과정을 겪은 ‘서식지(棲息地)’를 떠올리게 한다. 서식지란 ‘생물 따위가 일정한 곳에 자리를 잡고 사는 곳’(<웹 표준국어대사전> 기준)을 이른다. 하지만 이는 본래 의미가 아니다. ‘서(棲)’ 자가 ‘집, 보금자리’라는 뜻이고, ‘식(息)’이 ‘번식하다, 숨쉬다’란 의미다. 2010년까지만 해도 <표준국어대사전>은 ‘서식’을 동물이 깃들여 삶, ‘서식지’를 동물이 깃들여 사는 곳으로 설명했다. 당연히 ‘서식’은 동물에만 쓸 수 있는 말이었다. 그래서 무심코 ‘태백산 주목 서식지’니 ‘야생화 서식지’니 하는 표현을 쓰면 틀린 말이었다. 식물이 자라는 곳을 나타내려면 ‘군락지’나 ‘자생지’를 썼다.

하지만 2010년대 들어 <웹 표준국어대사전>의 ‘서식’과 ‘서식지’ 풀이가 지금처럼 동식물을 두루 포함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서식’의 용례 역시 그에 맞춰 ‘수생 식물 서식’과 ‘희귀 동물의 서식’을 함께 제시했다. 식물에도 ‘서식’을 쓸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저널리즘 글쓰기 10원칙> 저자·前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저널리즘 글쓰기 10원칙> 저자·前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그런 정보 수정 배경에는 언중이 ‘서식지’를 동식물 구별 없이 쓰는 언어현실을 반영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영어의 ‘habitat(동물이나 식물이 살거나 자라는 곳)’처럼 동식물을 아우르는 우리말이 없다는 점도 고려했을지 모른다. 어찌 됐든 지금 ‘서식지’는 동물과 식물에 두루 쓸 수 있게 ‘규범적 정당성’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