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 전등이 없는 밤을 상상할 수 있을까. 전등은 화재 위험이 적고 균일하게 밝은 조명이 가능한 획기적 발명품이었다. 전등이 일상에 확산하면서 생활양식이 변하고 야간 문화가 급속히 발달했다. 밤의 신세계가 열린 것이다.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물랭루주에서', 1892~1895년, 시카고미술관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물랭루주에서', 1892~1895년, 시카고미술관
벨 에포크의 전기 조명
1881년 프랑스 파리의 ‘산업궁전’에서는 세계 최초로 국제전기박람회가 열렸다. 미국과 유럽 각국이 참여해 전기 발명품을 전시하고, 전기의 단위와 기준들을 결정했다. 행사장은 수많은 전구가 빛을 밝히고, 전시된 발명품 중에서도 백열등을 사용한 전기 조명이 관심을 끌었다.

박람회가 성공하자 파리는 세계 전기의 중심지로 알려지게 된다. 파리의 가로등이 가스등에서 전등으로 교체되고 상점들도 새 전등을 달기 시작했다. 도시의 밤이 밝아지면서 야간에도 일하고 늦게까지 만남이나 쇼핑을 즐기게 됐다. 전깃불로 장식한 휘황찬란한 백화점이나 점포들이 즐비한 밤거리는 프랑스에서 이른바 ‘좋은 시절’로 회고되는 이 시기, 즉 ‘벨 에포크(Bell Époque)’의 표상과도 같았다.

1880년대 들어 파리에는 ‘르 샤 누아르(검은 고양이)’, ‘물랭루주(빨간 풍차)’ 같은 카바레들이 속속 개업했다. 이들 유흥업소에서는 음료와 식사뿐 아니라 음악, 춤, 연극 등 오락거리를 제공했다. 밤이면 전등을 밝혀 불야성을 이루고 업소마다 특색 있는 공연을 펼쳤다.

화가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년)는 물랭루주에 살다시피 하면서 그곳의 인물과 일상을 화폭에 옮겼다. 그림 <물랭루주에서>는 공연이 있기 전 카바레의 평상시 모습을 그린 것이다. 주인공도 없고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장면인데 기묘한 구도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왼쪽 가장자리는 수직 기둥이 테를 두르고, 그 밑에 연결된 난간이 비스듬히 앞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넓게 자른다. 안쪽 테이블에 단골손님과 유명한 전속 댄서들이 앉아 있고 그 뒤에 두 남자가 서 있는데 키가 작은 사람이 로트레크다. 뒤쪽 유리문 밖에는 전등이 여기저기 켜져 있는 또 다른 영업공간이 있다.

특이한 것은 오른쪽에 등장한 노란 머리 여자의 얼굴이다. 그녀는 우연히 장면에 튀어 들어온 듯 갑자기 앞을 막아선다. 얼굴과 몸이 클로즈업 돼 화면 가장자리에서 일부가 잘려 나갔다. 이 여성은 물랭루주의 가수 메이 밀턴인데, 얼굴에 허옇게 분을 칠하고 새빨갛게 입술을 발랐다. 그런데 얼굴 위 이마 쪽은 뜻밖에도 어색한 푸른색이다. 옆에서 전등 빛이 비쳐 그림자가 진 것이다. 강한 조명이 안면의 굴곡을 부각하고 기이한 색채 대비를 만들어낸다. 그녀의 얼굴은 무섭기도 하고, 건강하지 못하거나 퇴폐적으로 보인다. 로트레크는 전등 불빛을 이용해 실내 분위기를 갈색조로 통일하는 한편, 부분 조명으로 인물의 특징을 강조한다. 인공조명이 비현실적인 느낌을 조성하며 심야 카페 종사자의 애환 어린 불안한 심리를 전달한다.

로트레크의 그림은 벨 에포크의 유흥에 물든 파리의 야간 문화를 보여준다. 시대의 낙관적 비전과 달리 전등 밑 기괴한 얼굴은 도시의 발전과 함께 성장한 환락가의 명암을 알리는 듯하다.
자코모 발라, '가로등', 1909년, 뉴욕현대미술관
자코모 발라, '가로등', 1909년, 뉴욕현대미술관
나탈리아 곤차로바, '전등', 1913년, 파리퐁피두센터
나탈리아 곤차로바, '전등', 1913년, 파리퐁피두센터
인공의 빛에 대한 매혹
전등은 순식간에 세계로 퍼져나가 급속히 일상생활을 파고들었다. 20세기 초 이탈리아의 미래주의 예술가들에게 전기는 새 시대를 열어줄 에너지요, 희망찬 빛이었다. 미래주의 운동은 1909년 시인 필리포 마리네티가 ‘미래주의 선언’을 발표하면서 시작해 문학, 미술, 음악, 건축, 연극 등 전 예술 분야로 확산한 전위예술 운동이다. 미래파는 기존의 전통적 예술을 거부하고 과학기술이 낳은 속도와 기계의 미를 적극적으로 예술에 도입했다.

미래주의 화가 자코모 발라(Giacomo Balla, 1871~1958년)는 로마의 광장에서 밝게 빛나는 불빛을 보고 <가로등>을 그렸다. 로마에 처음 설치된 전기 가로등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림은 가로등 하나가 발산하는 불빛이 큰 화면을 가득 차지한다. 노랑과 흰색이 섞인 별 모양의 중심에서 밝은 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나온다. 발라는 빛을 다채로운 색으로 분할하고 색들을 중첩시켜 빛의 강약과 변화를 묘사했다. 갈고리처럼 뾰족뾰족한 터치가 특이한데, 색의 분할과 시각적 혼합을 유도할 뿐 아니라 불빛이 퍼지는 방향과 빛에너지의 역동적 힘을 보여준다.

하늘에 초승달이 떠 있지만, 그 빛의 힘은 가로등 불빛에 훨씬 못 미친다. 인공의 전깃불이 자연의 달빛을 능가한다. 발라는 전등이 발산하는 에너지를 묘사해 과학기술의 위대함을 칭송한다. 이제 전원적·낭만적 예술은 끝나고 현대의 기계 문명에 부합하는 도시적·역동적 예술이 도래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기술로 탄생한 속도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기계의 미학을 추구하는 미래주의 예술이다.

이탈리아 미래파의 영향을 받은 러시아 예술가들도 자국에서 다양한 형태로 미래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가장 중요한 그룹은 모스크바에서 형성된 ‘입체주의적 미래파(cubo-futurist)’였다. 그룹의 주요 멤버인 나탈리아 곤차로바(Natalia Goncharova, 1881~1962년)도 전등을 그림의 소재로 다뤘다.

작품 <전등>은 커다란 원과 곡선과 간단한 직선들로 대범하게 구성한 그림이다. 앞쪽을 넓게 차지하는 노란색 원 3개는 전구를 그린 것이다. 원들이 각각 동심원을 그리며 환하게 덩어리를 이루고 날카로운 광선이 방사형으로 뻗어나간다. 그 위의 연보라색 형체는 램프의 갓인데, 두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기의 에너지가 사람의 마음속 열정을 대변하며 전등의 강렬한 빛은 불꽃 튀는 감정의 교류와 일치한다. 주위의 주황색과 검은색 곡선들은 램프에 전기를 공급하는 전깃줄이다. 파동치는 곡선과 힘찬 직선들이 동력의 강한 흐름을 나타내며 삶의 활기를 비유한다.

곤차로바는 예술적 동반자 미하일 라리오노프와 함께 ‘광선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의 목표는 물체에서 반사된 광선들이 교차하며 생성하는 형태와 색의 조합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사물을 볼 때 그 대상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서 반사된 광선의 합을 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광선주의자들은 순수한 색과 형태의 세계에 몰두하며 추상회화로 나아간다. 이는 러시아 최초의 추상미술 운동 중 하나였으며, 새 시대의 혁명적 예술을 추구한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시작이었다.

글·사진 박은영 서울하우스 편집장(미술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