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이슬람에 밀려 동방과 교역이 끊긴 유럽…모든 것 부족한 '시장 없는 경제'로 추락
로마제국 멸망 후 이슬람 세력이 흥기하면서 동방과의 교역선이 끊긴 유럽은 자급자족 경제로 쇠퇴하게 된다. 이전까지 갈리아에선 마르세유 등의 무역항을 통해 콘스탄티노플, 이집트,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에서 파피루스와 향료, 고급 직물, 포도주, 올리브유 등 동방의 생산품이 수입됐다. 하지만 이들 시리아나 동방에서 갈리아 지역으로 유입되던 상품들은 8세기경에 이르면 수입로가 거의 완전히 막힌다. 남아 있던 극소수의 무역선을 통해 동방에 내놓을 만한 것은 지속적으로 공급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수지타산도 맞지 않는 노예 말고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히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다.

수입 줄면서 소박해진 경제활동

자연스럽게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상품들이 사라져갔다. 가장 먼저 파피루스가 없어졌다. 서유럽 지역에서 파피루스에 쓴 작품은 대부분 6~7세기 이전의 것이다. 메로빙거 시대에는 왕실 사무국에서 파피루스만 사용했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파피루스에 비해 불편하고 질이 많이 떨어지는 양피지로 대체됐다. 8세기 말까지도 약간의 개인 문서에서 여전히 파피루스가 쓰였지만 이는 예전에 수입해 보관했던 파피루스를 이용한 것이다. 재고가 떨어진 뒤에는 그나마 이런 호사도 불가능해졌다. 벨기에 출신 중세사가 앙리 피렌은 “갈리아에서 파피루스가 사라진 것은 상업이 쇠퇴하고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파피루스뿐 아니라 향신료에 대한 언급도 이 시대 사료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 시대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강제로’ 입맛도 단순해졌다. 지중해에서 상업이 재개된 12세기가 돼서야 향신료는 서유럽지역에 다시 등장한다. 가자 지방의 특산품이었던 와인 수입도 끊겼고, 오일도 더 이상 아프리카에서 수출되지 않았다. 아프리카산 오일을 구하지 못하면서 프로방스 지방에서 생산된 대체품으로 오일 수요를 메웠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이 시대 이후부터 교회에선 기름을 사용하는 등잔불이 아니라 양초를 이용해 불을 밝히게 됐다.

실크도 더 이상 구경할 수 없게 되면서 샤를마뉴 대제 같은 유럽의 최고위층까지 소박한 옷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샤를마뉴의 검소한 의상은 이전 시대 메로빙거 국왕들의 화려한 의복과는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아마도 샤를마뉴가 검소해서 그렇게 입었던 것은 아닐 가능성이 크다.

이 시대에는 심지어 부의 상징인 금의 공급마저 감소했다. 8세기에 금화는 금과 은의 합금으로 주조됐는데 시간이 갈수록 은의 분량이 증가했다. 금이 동방에서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갈리아에선 금화가 아주 귀한 것이 되면서 더는 통화로 사용되지 않았다. 금은 교환의 매개물로서보다는 그 가치가 교회를 장식하기 위한 보석으로 혹은 장식용 마구로 더 인정받았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피핀과 샤를마뉴 시대부터는 데나리우스 은화만 주조됐다.

동방과의 해상 교역이 쇠퇴하면서 직업 상인은 사라졌다. 포도주와 소금 등 약간의 필수품 운송이나 소규모의 불법적 노예무역 정도만 명맥을 유지했을 뿐이다. 상업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전과는 다른 소규모의 국지 상업으로 위축됐고, 상인도 비정규적인 존재로 전락했다. 상품과 사치품은 상업을 통해서가 아니라 전쟁이나 약탈에 의해 유통되거나 선물 형태로 교환됐다.

촌락 중심의 폐쇄적 소비경제

중세시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서유럽 주요 지역은 촌락 중심 경제로 재편됐고 경제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했던 농민의 삶은 촌락에 묶였다. 농업은 풍년이 들어도 잉여 농산물이 거의 없고, 흉년이 들면 심각한 기근이 불가피한 수준이었다. 대장장이나 목수 등 일부 직업 분화가 있긴 했지만 대부분 농민은 장인 역할까지 같이 했다. 살리카법전(Lex Salica)에는 대장장이, 목수, 기타 노동자를 통칭하는 두루뭉술한 용어인 ‘바페르(faber)’만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소수의 장인들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역 농민으로 잡았다. 로마제국 시대의 교환경제는 폐쇄적인 소비경제로 대체됐다. 9세기 서유럽 지역은 ‘폐쇄적 가내경제’ 혹은 ‘시장 없는 경제’의 황금기로 평가되기도 한다.

농민들이 촌락 바깥 세계와 접촉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의식주 대부분은 촌락 내부에서 해결했다. 자연스럽게 농민들의 의식주는 매우 소박해서 진흙 벽에 초가지붕을 얹은 오두막이 주택의 대부분이었다. 옷은 솜씨가 서툰 아내가 만든 조잡한 것이었고 음식은 거친 빵조차 넉넉하지 못했다. 운 좋은 사람들만 닭을 몇 마리 기를 뿐이었다. 겨울철에 먹여 살릴 수 없는 동물을 한꺼번에 도살하는 가을에만 질기고 양도 적었지만 소고기 등을 맛볼 수 있었다. 겨울이나 여름 상관없이 방목지에서 ‘알아서 살아남은’ 돼지만이 주요 단백질 공급원이 됐다. 이 같은 상황을 반영하듯 1086년 영국에서 이뤄진 대대적인 인구조사 사업의 결과인 《둠스데이북(Domesday Book)》에서는 특정 촌락의 삼림 크기를 그 삼림에서 몇 마리의 돼지가 연명할 수 있는가로 표시했다.

중세시대 사료에서 ‘메르카토레스(mercatores)’나 ‘네고시아토레스(negociatores)’로 불린 상인들의 특별한 활동인 원거리 무역을 감시하는 일은 각 지역 통치자가 책임졌다. 상인들은 많은 지역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았고 신변 안전을 보장받지 못했다. 카롤링거 왕조에서는 여행자들에 대해 식량과 사료 판매를 제외한 모든 밤에 이뤄지는 상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노예나 말, 금은 제품 등의 품목이 거래될 때는 백작이나 주교가 배석해 감시토록 했다.

이처럼 고대세계에서 그토록 번성했던 경제는, 교역의 끈이 끊기면서 어두운 퇴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르네상스 시기 유럽인은 ‘중세’라는 개념을 만들면서 대기 시간 같은 ‘중간 시기’ ‘낀 시대’라는 경멸적 의미에서 중세를 ‘메디아 아이타스(media aetas)’ ‘메디움 아이붐(medium aevum)’이라고 불렀다. 중세인들로선 억울할 법한 규정이지만 사실 초창기 중세 경제의 모습은 후대인들에게 크게 내세울 게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지만, 로마 멸망 후 유럽 경제의 쇠락은 그렇게나 빨리 진행됐다.

NIE 포인트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이슬람에 밀려 동방과 교역이 끊긴 유럽…모든 것 부족한 '시장 없는 경제'로 추락
① 자급자족형 경제보다 자유무역에 바탕한 시장경제가 더 발전하는 이유는 왜일까.

② 비교우위에 입각한 분업이 효율적임에도 오랫동안 직업이 다양해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③ 찬란한 그리스·로마문명이 쇠퇴하고 오랫동안 발전이 정체됐다는 점에서 중세를 ‘암흑시대’로 규정하는 것이 타당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