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사람들이 가끔 묻는다네.
희끗희끗한 귀밑머리와
이마에 팬 내 주름살을 보고는
나이가 몇이나 되냐고.

그럴 때 난 이렇게 대답하지.
내 나이는 한 시간이라고.
여태까지 살아온 세월을 헤아리고
그 모든 걸 다 합친다 해도 말이야.

아니 뭐라구요?
사람들은 깜짝 놀라면서
또 이렇게 되묻는다네.
그런 셈법을 진짜로 믿으라구요?

그러면 나는 얘기하지.
이 세상에서 제일로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날 내 품에 살짝 안겨
은밀하게 입을 맞춘 그 순간,

지나온 날들이 아무리 많아도
나는 그 짧은 시간만을
나이로 센다고.
정말 그 황홀한 순간이 내 모든 삶이니까.

이븐 하즘(994~1064) : 중세 스페인 시인이자 역사가·법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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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 짧고 황홀한 순간만을 나이로 센다네…

누구에게나 있지요.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입맞춤처럼 ‘짧지만 영원한’ 순간의 아름다움!
시인 이븐 하즘은 바로 그 ‘순간’들이 모여 세월의 지층을 이루고, 그 단면에 새겨진 행복의 나이테가 곧 ‘내 삶의 전부’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영국에서 이런 질문으로 현상 공모를 한 적이 있는데, 1등은 ‘해변에서 가족과 함께 모래성을 쌓고 있는 어린이’였습니다.

그다음으로는 집안일을 마치고 휘파람을 불며 아기를 목욕시키는 사람, 작품 완성을 눈앞에 두고 붓에 물감을 묻히는 화가,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땀을 닦는 외과 의사가 꼽혔습니다.

바닷가에서 평화롭게 모래성을 쌓는 아이의 표정을 한번 떠올려보세요. 쉬는 날 한가롭게 집안 정리를 끝내고 사랑스런 아기를 목욕시키는 사람은 또 어떤가요. 콧노래나 휘파람이 절로 나오게 됩니다.

온 정신을 집중해서 그림을 그리면서 마지막 ‘화룡점정’의 순간을 앞둔 예술가, 어려운 수술을 무사히 끝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땀방울을 훔치는 의사의 마음도 그럴 겁니다.

행복이란 거창한 게 아니지요. 행복은 지금, 바로 여기 우리 곁에 있다는데 우리는 ‘파랑새’를 찾아 먼 곳을 떠돌곤 합니다.

‘아버지의 한 시간’이라는 일화가 떠오릅니다. 저녁 늦게 피곤한 얼굴로 퇴근한 아버지에게 다섯 살 난 아들이 물었지요.

“아빠는 한 시간에 돈을 얼마나 벌어요?”
“그건 네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란다.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니?”
“그냥 알고 싶어서요. 말해주세요. 네?”
“네가 정 알아야겠다면…… 한 시간에 20달러란다.”
“아…….”

아들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말했습니다. “아빠, 저에게 10달러만 빌려주세요.”
아버지는 귀찮은 듯 말했지요. “뭐하려고? 장난감 사려고 한다면 당장 네 방에 가서 잠이나 자거라.”

아들은 말없이 방으로 가서 문을 닫았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자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10달러로 꼭 사야 할 뭔가가 있겠지. 게다가 평소에 자주 용돈을 달라고 떼쓰던 녀석도 아니니까.’

아버지는 아들 방으로 가서 문을 가만히 열었습니다.
“자니?” “아니요, 아빠…….”
“아빠가 좀 심했던 거 같구나. 오늘은 좀 힘든 일들이 많아서 퉁명스럽게 말했던 것 같다. 자, 여기 네가 달라고 했던 10달러다.”

아들은 벌떡 일어나서 “고마워요, 아빠!”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러고는 베개 아래에서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을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천천히 돈을 세어 보더니 아버지를 쳐다보았죠.

“아빠, 저 이젠 20달러가 있어요. 아빠의 시간을 한 시간만 살 수 있을까요? 내일은 조금 일찍 집에 와 주세요. 아빠랑 저녁을 같이 먹고 싶어요.”

이 대목을 읽고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곧이어 많은 생각을 하게 됐지요.
고속철도가 더 빨라지고, 상품광고가 늘어나고, 쾌락을 위한 도구가 훨씬 많아졌는데도 정작 행복을 느끼기는 더 어려워졌다고들 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덧보태 쓴 시 ‘우리 시대의 역설’에 나오는 구절처럼 ‘인생을 사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은 잊어버리고’ 사는 우리…… .

꼭 아버지와 아들뿐이겠습니까. 행복이 곁에 와 있는 줄 모르고, 그 소중함을 발견하지 못한 채 허둥거리며 살아온 제 모습을 오랫동안 거울에 비추어 보았습니다.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