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나라 시대 전선 ‘오아(五牙)’의 복원 모형
수나라 시대 전선 ‘오아(五牙)’의 복원 모형
서기 598년, 고구려가 요서지방을 공격하면서 수나라와 ‘고·수(高·隋)전쟁’의 신호탄이 올랐다. 이후 ‘고·당(高·唐)전쟁’을 거쳐 신라가 참여한 이른바 ‘삼국통일전쟁’까지 지속됐다. 전쟁의 목적과 진행 과정, 결과 등을 보면 몇 단계로 구성된 ‘70년 전쟁’이었다. 한륙도(한반도와 만주 포함)·중국·일본열도·몽골·알타이·중앙아시아가 포함된 유라시아 세계의 질서가 재편되는 그레이트 게임이었다.

유라시아 동쪽은 1세기 이상 분단된 남·북 중국, 몽골 초원의 유연, 동쪽의 패자인 고구려 등 4핵과 그 주변에 백제·신라·왜·말갈·거란 등의 소핵들이 상호 작용하면서 다원적인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6세기 말에 동아시아는 중국을 통일(589년)한 수나라와 튀르크제국, 고구려의 삼각구도로 재편됐다. 400년 만에 중국을 장악한 수나라는 정치·경제적 통일을 추진하면서 대제국을 건설해 중화 종주권 탈환에 나섰고 고구려도 신흥 강국들과 경쟁·대결이 불가피했다.

수나라 공격 막은 요동성 성주 강이식

치밀한 준비로 수나라와 16년 전쟁 승리한 고구려…동아시아 종주권 확고히 하며 위상 한껏 드높여
이런 상황에서 동아시아 모든 국가와 종족들이 직·간접으로 참여하는 국제대전이 본격 터졌다. 612년, 수양제가 이끄는 113만여 명의 다국적 군대가 북경 근처 탁군을 출발했고, 그 두 배에 달하는 보조 인력이 동원됐다. 총 24군 편제인데, 11군은 수군으로 작전범위가 압록강 하구, 평양, 한강유역까지였다. 출항한 배의 행렬이 수백 리에 걸쳐 늘어설 정도였다. 육군을 지휘한 수양제는 요하 도하작전을 어렵게 성공시킨 뒤 요하전선의 몇몇 성을 함락시켰다. 이어 부(副)수도이며 핵심 방어성인 요동성(오렬홀, 현재 랴오양시)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엄청난 군대와 당거(바퀴 달린 공성무기)·충거(성벽을 부수는 차)·운제(높은 사닥다리) 등 신무기들을 동원했으며, 심지어는 땅굴까지 팠으나 실패했다. 이 상황에서 공포와 열세를 무릅쓰고 대승리를 거둔 탁월한 전략가이며, 정치가인 성주의 이름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누군가가 존재를 지운 탓이다. 훗날 신채호는 《서곽잡록》 등을 인용해 그가 ‘강이식’임을 찾아줬다(신채호, 《조선상고사》).

수나라 별동대 궤멸시킨 고건무·을지문덕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수양제는 전략을 변경해 평양성 해륙협공작전을 지시했다. 육군은 경무장한 별동대 30만 명으로 고구려의 주력방어선을 피해 요하전선을 우회한 뒤 남쪽으로 신속히 진군했다. 산동해안을 출항한 수군 함대는 황해를 건너 평양성을 협공하고, 별동대에 군수물자를 제공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대동강 상륙작전에 성공하자 래호아는 공명심에 불타 별동대의 평양성 접근을 기다리지 않은 채 수군 단독으로 직접 공격했다. 그러나 이미 역이용 작전을 세운 고건무 장군(후에 영류왕)의 유인작전과 대동강 방어체제에 걸려 평양성 60리 밖에서 궤멸했다. 대기하던 을지문덕은 즉시 추격전을 펼쳤고, 보급망을 상실한 우중문과 우문술의 별동대는 서둘러 퇴각하다가 살수(압록강설, 청천강설, 대양하설)에서 매복과 수공작전에 걸려 전멸당했다. 수나라는 요하를 건너 살아온 자가 겨우 2700여 명일 정도로 대패했다(《자치통감》). 수나라는 이듬해인 613년과 614년에도 요하전선을 공격했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었고, 건국한 지 30년 만인 618년 결국 멸망했다.

고구려 대승의 요인과 교훈

동아시아의 종주권과 무역권, 문명갈등을 놓고 중국 세력과 벌인 16년간의 대전쟁에서 대승한 고구려는 동쪽 유라시아 세계에서 위상이 높아졌다. 숱한 군수물자와 포로 등 경제력을 획득했으며 자신감 또한 커졌다. 618년에는 왜국에 포로 두 명과 악기·낙타 등을 보냈다.

고구려가 세계 전사상 최고의 대승리를 거둔 요인은 무엇일까? 먼저, 거시적인 안목을 갖고 긴박하게 변하는 국제질서의 본질을 파악했다. 전쟁상황에 대비해 민관이 철저하게 준비했고, 유기적인 방어체제를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적의 해륙협공작전을 유도한 뒤 역으로 해륙방어작전을 시도해 수군과 육군을 동시에 격퇴했다. 또한 고구려인의 자유의지와 힘, 애국심과 강이식, 고건무, 을지문덕 같은 인재들을 활용했다.

미·중의 ‘새 그레이트 게임’에 낀 잼너트(jam nut: 큰 너트 사이에 넣는 얇은 작은 너트) 상태로 전락하는데도 사분오열된 채 사대주의와 반도사관에 허우적거리는 지금의 한민족은 과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 기억해주세요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동아시아의 종주권과 무역권, 문명 갈등을 놓고 중국 세력과 벌인 16년간의 대전쟁에서 대승한 고구려는 동쪽 유라시아 세계에서 위상이 높아졌다. 고구려가 세계 전사상 최고 대승리를 거둔 요인은 전쟁 상황에 대비해 민관이 철저하게 준비했고, 유기적인 방어체제를 전략적으로 활용한 덕분이다. 또한 고구려인의 자유의지와 힘, 애국심과 강이식, 고건무, 을지문덕 같은 인재들이 있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