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금관과 장식품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금관과 장식품
강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나라와 사회, 문명을 건설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할까. ‘산업력’ ‘기술력’ ‘무장력’ 등이 떠오르지만 근본은 ‘사람의 힘(人力)’이고, ‘사람산업(정신사업 인재양성사업)’이다. 스파르타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문화국가’ ‘경제국가’라고 자만한 아테네에 승리한 근본적 이유는 단결심, 애국심, 책임감을 지닌 시민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경주 거대 고분, 강력한 왕권 확립 시사

신라는 4세기 말까지도 세계 질서에 어두웠고, 자체의 통일조차 완수하지 못한 변방의 ‘소국연맹국가’였다(이종욱 교수). 그런데 5세기에 이르면서 신라 내부에 엄청난 변화가 발생했다. 그 증거가 경주 대릉원에 남은 큰 규모의 고분들과 그 안에서 발견된 황금유물들이다. 동서 길이 80m, 남북 길이 120m, 높이가 25m나 되는 황남대총(98호 고분)을 비롯한 거대한 고분들은 강력한 왕권의 출현을 의미한다. 기술력과 경제력도 급신장했음을 알 수 있다.

경주 지역에서만 6개 발견된 금관·허리띠, 금목걸이를 비롯한 각종 황금유물과 구슬·유리제품들은 부가가치가 절대적인 금광산업과 화공기술이 발달했고, 상상을 뛰어넘는 공예 기술력 또한 갖췄음을 증명한다. 알타이 산록의 이식고분군에서 발굴된 황금인간, 사르마트 금관, 틸리아테페 금관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기술과 미(美)의식은 신라가 매우 수준 높은 문화사회로 진입했으며, 국제사회에 적극적이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고구려로부터 선진 문물과 기술력 배워

알타이 유목민 문화와 비슷한 적석목곽 고분과 금관 등 부장품들, 유리제품 등 수입품을 근거로 신라가 북방 유목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심지어는 왕실이 흉노계라는 주장도 있다(김병모 교수). 자생설(박선희 교수)도 있지만, 그 연관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초기부터 건국의 주체인 원조선의 유민을 통해 만주 및 알타이 유목문화와 연관이 있었다. 그런데 왜 수백 년이나 흐른 5세기에 다시 비슷한 문화가 등장했을까?

그 시대에 등장한 고구려와는 관계가 없을까? 서기 400년에는 광개토태왕의 5만 군대가 신라의 파병 요청을 명분으로 신라 영토에 진입했다. 신라는 계속해서 영토를 빼앗겼고, 자주성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신라인은 이 같은 현실을 역이용했다. 고구려인이 가져온 선진 문물과 기술력, 군수품과 군대의 조직력 등을 수용했다. 실성왕처럼 인질로 파견된 왕족과 귀족은 국가 조직의 실태와 운영 능력을 습득했고, 동아시아는 물론 유라시아 세계의 문화 등을 배우면서 국제질서를 파악하는 거시적인 안목을 갖게 됐다. 408년에는 고구려 주도이긴 했지만 대마도(쓰시마섬)를 공격하는 계획을 수립할 정도였다(윤명철 《고구려 해양사 연구》).

5세기의 전면적 국가 변혁

이어 5세기 후반부터 국가의 전면적인 변혁이 추진됐다. 정신적인 측면에서 신궁을 설치(487년)하고 불교를 수용하며 왕권을 강화했다. 또한 도로를 정비하고 시장을 활성화시켰다(490년). 6세기에 들어오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도움을 받아 서해를 건너 중국 지역과 교류를 시작했다. 또 김이사부의 주도로 반세기 동안 정치적인 야망, 토지나 인민의 증가를 위한 전투가 아니라 전략적인 거점들을 단계적으로 확보하는 전쟁을 추진했다. 그리고 ‘마립간(칸)’이라는 칭호를 버리고, 법흥왕 때부터는 ‘대왕(태왕)’으로 칭하고 연호를 사용했다. 이어 골품제를 실시하고, 관부를 설치하며, 군사조직을 개편했다. 보편적이고 국제적인 연대성이 강한 불교를 공인했다.

선덕여왕 땐 황룡사에 약 80m에 달하는 9층탑을 세웠다. 1층은 일본, 2층 중화, 3층 오월, 4층 탁라, 5층 응유, 6층 말갈, 7층 거란, 8층 여적, 9층은 예맥을 억누른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약소국인 신라 지도층이 자신과 백성들에게는 물론이고 주변국들에 강국의 건설과 통일의 실현이라는 일종의 국시를 자신감 있게 선언한 징표는 아닐까? 이렇게 복잡한 국제질서 속에서 위기를 극복하고, 신사회를 꿈꾼 신라는 ‘화랑’이라는 특별하고 뛰어난 인재를 양성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 기억해주세요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동국대 명예교수·사마르칸트대 교수
신라는 4세기 말까지도 세계 질서에 어두웠으나 5세기에 이르러 내부에 엄청난 변화가 발생했다. 그 증거가 경주 대릉원에 남은 큰 규모의 고분들과 그 안에서 발견된 황금 유물들이다. 신라는 고구려인이 가져온 선진 문물과 기술력, 군수품과 군대 조직력 등을 수용했다. 유라시아의 문화 등을 배우면서 국제질서를 파악하는 거시적인 안목을 갖추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