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류층의 보석이 실생활의 필수품으로,
식탁의 주연 ‘유리’ 이야기.

[한경 머니=글 백정림 갤러리 이고 대표·<앤티크의 발견> 저자 | 사진 서범세 기자] 우리들의 중요한 인생사마다 축하주로 등장하는 샴페인을 유리 글라스가 아닌 도자기 컵이나 금속으로 된 잔에 부어 건배를 한다면 영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 될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유리가 주는 우아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유리는 도자기와는 달리 화려하고 섬세한 느낌을 선사한다.
[백정림의 앤티크] 아르누보, 유리공예를 꽃피우다
(위쪽부터 시계방향) 조선 유기 그릇을 화기로 쓴 꽃꽂이. 2단 트레이와 크리스털 접시(빅토리안). 정교하게 스털링을 조각해 장식한 크리스털 볼과 스털링 샐러드 서버(아르누보& 빅토리안)

루이 14세의 유리 사랑

이렇듯 현대의 삶에 꼭 필요한 유리는 오랜 기간 사치품으로 자리매김하며 상류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주로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상류층의 보석으로 쓰였던 유리가 실생활의 필수품이 된 것은 거울을 통해서다.

12세기에서 13세기경부터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점차 보급된 유리거울은 유리 뒤편에 얇은 주석판을 붙이는 방법으로 생산됐다. 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명품으로 15세기 르네상스기에 베네치아가 부를 축적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베네치아의 거울은 이전의 희미했던 금속거울과는 차원이 다른 평면거울이었기에 유럽 귀족들은 거울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거울이 사치품으로 등극해 비싼 몸값을 지니게 되자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이탈리아에서 많은 기술자를 초청해 대형 유리판 제조에 몰두했다.

루이 14세의 이러한 열정의 결과로 마침내 프랑스에서 대형 거울이 생산됐다. 유리기술의 유출을 막기 위해서 장인들을 ‘무라노’섬에 유폐했던 베네치아의 혹독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거울이 드디어 질과 양 모든 면에서 베네치아를 압도하게 된 것이다.
은으로 마감된 소금· 후추통(아르누보).
은으로 마감된 소금· 후추통(아르누보).
이후 유럽의 많은 궁궐에서 실내장식으로 내벽에 거울을 붙이는 취향이 크게 유행하게 됐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베르사유 궁전에 있는 ‘거울의 방’ 유리거울 또한 바로크 시대 유리의 귀한 몸값에 연유한 상류층의 취향을 반영한 것이다.

당시 4㎡ 크기의 유리 가격은 유리 기술자 한 사람의 1년치 임금에 상당했다고 하니 엄청난 유리의 몸값을 짐작할 수 있다. 유리는 바로크 시대를 거쳐 로코코 시대의 살롱 문화와 장식미술 발달에 힘입어 가구로서 재인식되며 이후 실내공간에서 더욱 가까이 머물게 된다.

사람들의 생활과 더욱 가까워진 유리는 1890년대부터 나타난 아르누보라는 예술사조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새로운 예술이라는 의미의 아르누보는 이제까지 회화와 조각에 한정됐던 미술의 영역을 생활 전반으로 확대시켰다.
편병 모양의 루비 레드 크리스털 화병(아르누보).
편병 모양의 루비 레드 크리스털 화병(아르누보).
당시 유럽인들은 산업혁명의 영향 속에서 기계로 대량 생산된 조악한 상품들을 접하며 당황스러워했다.

섬세한 수공예의 취향을 그리워하던 당시에 자연에서 온 부드러운 곡선과 파스텔 톤의 색조를 특징으로 하며 가구, 공예, 보석, 건축 등 모든 생활에 영향력을 발휘했던 아르누보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20여 년간 새로운 예술로서 일상생활 깊숙이 번져나갔다.

아르누보 양식은 식물의 형태에서 본뜬 자유롭게 흐르는 선을 가장 중시했는데 이는 로코코 시대부터 서양 사회를 줄곧 주름잡았던 동양의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실크로드 시대부터 계속돼왔던 유럽인들의 동양 문화에 대한 열망은 19세기 말 아르누보라는 예술사조를 통해 더 활짝 피어났다.


모든 문화는 사람들의 열망, 즉 니즈(needs)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값비쌌던 유리를 대량 생산을 통해 과거보다 더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자 유리와 관련된 산업과 직업들이 많이 생겨났다. 세계 최초의 박람회였던 런던 만국박람회에서 조지 팩스턴은 유리와 철골을 주요 자재로 한 거대한 유리 건축물인 ‘수정궁’을 만들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프랑스 동북부에 위치한 낭시라는 도시는 에밀 갈레라는 천재 공예가가 나타나 유리 공예의 성지가 됐다.
스털링 디테일의 소금·후추통(아르누보).
스털링 디테일의 소금·후추통(아르누보).
유리 건축물·향수병 등 유리 혁신

아르누보를 빛낸 많은 유리공예 예술가들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작가는 르네 랄리크일 것이다. 그는 보석 세공사로서 먼저 이름을 알렸지만 1901년부터는 유리세공 작업에 몰두해 1910년경에는 주얼리 제작을 중단하고 오직 유리제품을 제작하는 데에만 몰두하는 방향으로 작품 세계를 전환했다.

유리공예라는 새로운 분야에서의 그의 혁신적인 행보는 1908년 랄리크가 프랑수아 코티로부터 향수병 디자인을 주문 받은 해에 이루어졌다. 랄리크가 새로 고안한 유리제조 방법은 정밀한 조각이 필요한 향수병의 대량 생산을 가능케 했다. 당시 향수병은 손으로 직접 만들었기 때문에 값이 비싸서 상류층만의 애용품이었다.

랄리크는 그의 서정성 있는 표현과 모던한 용기 형태에 힘입어 곧 세계적인 팬을 갖게 됐다. 그의 유리제조 사업은 확장을 거듭했고, 특히나 크리스털은 반짝이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우아한 크리스털 제품의 제작에 몰두했다. 프로스티드(frosted) 크리스털 볼이나 오팔레슨트(opalescent) 볼은 랄리크의 독특한 유리공예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예술로 승화시켰던 아르누보는 인류가 전쟁의 포화 속에 내몰리는 세계대전을 겪기 직전의 인간미 넘치는 착한 예술사조다.

사람이 그리운 요즈음이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사람의 손맛이 느껴지는 아르누보의 유리공예가 요즈음 더 귀하고 사랑스럽다. 어찌보면 아르누보는 급속한 기계문명의 발달로 치열하고 변화무쌍했던 19세기를 살아냈던 사람들의 한 박자 쉼표와도 같은 것이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열망과 경쟁 속에서 사람들은 자연에서 위안을 받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백정림 앤티크 컬렉터는...
하우스 갤러리 이고의 백정림 대표는 한국 앤티크와 서양 앤티크 컬렉터로서, 품격 있고 따뜻한 홈 문화의 전도사다. 인문학과 함께하는 앤티크 테이블 스타일링 클래스와 앤티크 컬렉션을 활용한 홈 인테리어, 홈 파티 등을 제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