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박은영 서울하우스 편집장·미술사가] 레몬은 겉보기엔 아름답고 맛있을 것 같지만 속은 시어서 그냥 먹기엔 힘든 과일이다. 겉과 속이 너무 다르므로 상반된 의미를 띤 여러 가지 비유로 사용된다.
야콥 판 훌스동크, '레몬, 오렌지, 석류가 있는 정물', 1630년경, 미국 로스앤젤레스 장 폴 게티 미술관
야콥 판 훌스동크, '레몬, 오렌지, 석류가 있는 정물', 1630년경, 미국 로스앤젤레스 장 폴 게티 미술관
산뜻한 노란색 과일 레몬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상쾌해진다. 톡 쏘는 신맛을 떠올리며 입안에 침이 고이기 마련이다. 맛이 좀 달콤하면 좋으련만, 오렌지처럼 말랑해 보이는 겉모습에 속아 레몬의 속살을 덥석 먹었다가는 진저리를 치게 된다.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르다는 이유로 레몬은 기만이나 실망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또 레몬의 신맛은 혹독한 시련이나 역경에 대한 비유로 쓰인다. 그런데 고난을 이겨내면 더 큰 보람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 그래서 레몬은 사랑의 굴곡을 견뎌낸 정절, 종교적 수난을 감당한 신실함, 치유와 정화 등 긍정적 의미를 띠기도 한다. 바로크 시대의 정물화에서 레몬의 다양한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테이블 위 열대 과일
16세기 후반부터 네덜란드에서는 부유층으로 성장한 신흥 상인, 부르주아들이 미술품의 주요 고객으로 대두됐다. 그들은 내용이 무거운 대형 그림보다는 인물이 없는 소형 그림을 더 좋아했다. 이때부터 정물화가 회화의 독립된 장르로 발달하기 시작해 17세기에는 정물화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가장 흔한 정물화 형식은 테이블에 사물을 배치한 것인데 꽃, 과일, 음식, 도자기, 식기, 책 등 다양한 사물이 소재로 올랐다. 과일 중에서 제일 자주 나오는 것은 레몬이다. 유럽에 흔한 포도나 사과보다 더 많은데, 그 이유가 궁금해진다.

17세기 전반, 정물화가 야콥 판 훌스동크(Jacob van Hulsdonck, 1582~1647년)는 꽃과 과일을 정밀하고 생생하게 묘사해 독자적 세계를 이룩했다. <레몬, 오렌지, 석류가 있는 정물>에서 그는 과일이 가득 담긴 도자기 접시를 그렸다. 레몬, 오렌지, 석류는 아열대 과일로 유럽에서는 지중해 연안이나 스페인 남부에서 재배된다. 네덜란드 같은 북부 유럽에서는 수입해야 먹을 수 있는 고급 과일이다.

그런데 그림 속 과일 중 다수가 꽃과 잎이 달린 가지에 붙어 있다. 꽃은 싱싱하고 오렌지 잎에는 이슬이 맺혀 있다. 테이블에 떨어진 물방울도 아직 마르지 않았으니 아마 방금 과일을 따온 모양이다. 벌써 먹기 좋게 잘린 석류와 레몬 조각의 상큼한 과육이 침샘을 자극한다.

이렇게 신선한 열대 과일을 얻으려면 가까이에 온실정원이 있어야 한다. 당시 네덜란드의 부자들은 온실을 짓고 오렌지나 레몬나무를 직접 키웠다. 레몬이 네덜란드 정물화에 자주 나오는 이유는 그것이 부유함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과일을 담은 청화백자도 중국에서 온 고가의 수입품으로, 소유자의 부와 고상한 안목을 나타낸다. 온실이나 값비싼 물건을 직접 가지지 못한 사람도 정물화를 소장해 대리만족을 할 수 있었다. 수많은 복제품이 유통될 만큼 정물화가 인기를 끌며 18세기까지 대유행을 불러일으켰다.
피터 클라스존, '정물', 1629년, 개인 소장
피터 클라스존, '정물', 1629년, 개인 소장
얀 다비드존 데 헤임, '과일, 꽃, 유리잔, 바닷가재가 있는 정물', 1642년, 개인 소장
얀 다비드존 데 헤임, '과일, 꽃, 유리잔, 바닷가재가 있는 정물', 1642년, 개인 소장
껍질이 벗겨진 레몬
훌스동크와 비슷한 시기에 정물화의 대가로 큰 명성을 얻은 피터 클라스존(Pieter Claesz, c. 1597~1661년)의 작품에도 레몬은 단골 메뉴로 나온다. 그의 정물화는 차분한 단색조로 사물에 비치는 부드러운 빛의 효과를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1629년 작품 <정물>에서 보듯이 식탁의 한쪽을 정면에서 낮은 시점으로 포착하고 배경의 여백을 넓게 남겨 고요하고 절제된 분위기를 조성한다. 식탁에는 음료가 들어 있는 큰 유리잔과 쓰러진 빈 술잔이 있고, 백랍 접시들과 나이프, 레몬 3개가 있다. 레몬 중 하나는 반쯤 껍질이 벗겨져 접시 위에 놓여 있다. 길게 벗겨낸 껍질이 여전히 레몬에 붙어 있는데, 처음부터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끝이 도르르 말린 채 늘어져 있다. 이렇게 껍질을 일부 벗긴 레몬은 식탁 장면에 아주 흔히 그려져 네덜란드 정물화에서 하나의 양식으로 이어졌다.

17세기 중엽 가장 뛰어난 정물화가 얀 다비드존 데 헤임(Jan Davidsz. de Heem, 1606~1683/4년)의 풍성한 식탁 그림에도 레몬은 자주 나타난다. 1642년에 그린 정물화에는 초록색 천이 덮인 식탁 위에 고급 식기와 바닷가재, 굴, 새우, 포도 등과 함께 레몬들이 흩어져 있다. 여기서도 레몬 2개는 온전하고 하나는 반쯤 잘린 채 벗겨낸 껍질을 길게 달고 있다. 데 헤임은 더 나아가 레몬 껍질의 구불구불한 곡선을 화면 구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술잔 받침 장식 위에 올려놓은 유리잔 꼭대기에 레몬 껍질이 걸려 용수철처럼 탄력 있게 말리면서 아래로 처져 삼각형의 안정된 구도를 완성한다.

그런데 네덜란드 화가들은 왜 다른 과일은 그냥 두면서 레몬만은 껍질을 벗겼을까. 껍질을 끊어내지 않고 길게 늘어뜨린 이유는 무엇일까. 레몬의 겉과 속이 다름을 드러내 세상사의 표리부동함을 경계하라는 의미를 전하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레몬 껍질이 구불구불 이어지는 건 시간의 흐름을 비유한 것으로 해석된다. 껍질이 일부분만 벗겨진 것은 삶의 시간이 그만큼 지나갔음을 가리킨다.

레몬은 고급 과일이고 생선 같은 다른 음식과 곁들여 먹으면 풍미를 돋울 수 있다. 작품의 주문자는 그림을 감상하면서 미각의 쾌감을 느끼며 자신의 부와 세련된 취향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화가의 입장에서는 레몬이 재주를 맘껏 뽐낼 수 있는 좋은 소재였다. 과일의 선명한 노란색으로 그림에 생기를 부여하고, 오돌토돌한 표면을 매끈한 식기와 대조시켜 변화를 주며, 과육과 껍질 안팎의 미묘한 질감의 차이를 섬세하게 그려내곤 했다. 그것은 사진이 없었던 그 시대에 오직 뛰어난 화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