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보다 실리…화려함보다 비용 절감·계열사 시너지 등 ‘실용성’ 중시 트렌드

[비즈니스 포커스]
‘마천루 가고 실용의 시대 왔다’ 100년 대계 신사옥 규모 축소하는 이유
현대차그룹·두산그룹·넷마블·DL그룹 등이 ‘기업의 얼굴’인 사옥을 새로 짓고 신사옥으로 이전을 준비하고 있다. 과거에는 사옥이 기업 문화와 아이덴티티를 나타낼 수 있는 랜드마크로서의 기능과 상징성이 크게 부각됐지만 최근에는 얼마나 경제적이고 실용성이 있는지가 중시된다. 성장한 기업이 사세 확장으로 각 계열사를 통합, 신사옥에 집결시켜 시너지를 높이거나 새로운 경영 비전에 따른 터닝포인트 마련 등 다양한 이유로 사옥을 이전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GBC, ‘마천루 꿈’ 접고 미래 사업에 투자
현대차그룹이 서울 삼성동에 짓고 있는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는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의 숙원 사업인 동시에 새로운 ‘정의선 시대’를 상징한다. 현대차그룹은 2014년 10조5500억원을 들여 서울 삼성동의 구 한국전력 부지(7만9341㎡)를 사들였다. 한전 부지는 서울 강남권에 마지막 남은 금싸라기 땅으로 평가받던 곳이다. 현대차그룹(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 컨소시엄)과 삼성그룹(삼성전자)이 구 한전 부지 입찰전에 뛰어들었지만 최고가 입찰 방식에 따라 당시 감정가인 3조3346억원의 3배가 넘는 10조5500억원을 써낸 현대차그룹이 낙찰받았다.

현대차그룹은 입찰 당시 한전 부지에 105층 규모의 초고층 GBC를 짓고 그룹사를 통합 관리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 기능을 확보하는 동시에 문화·생활·컨벤션 기능을 아우르는 랜드마크를 조성해 한국판 아우토슈타트를 만들 계획이었다. 정 명예회장은 2016년 GBC 현장을 방문해 “GBC는 현대차그룹의 새로운 100년의 상징이자 초일류 기업 도약의 꿈을 실현하는 중심”이라고 각별한 애정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명분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실용주의 성향의 정 회장이 취임하면서 사옥을 바라보는 현대차의 방침에 변화가 생겼다. 최근 현대차는 GBC 건물 높이를 낮추는 방향을 검토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GBC를 105층 1개 동으로 건립할 예정이었으나 최근 70층 2~3개 동, 50층 3개 동 등으로 설계를 변경하는 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가장 유력한 것은 50층 3개 동으로 설계하는 안이다.

105층(569m) 1개 동으로 지으면 123층 규모의 제2롯데월드 타워(555m)를 제치고 한국의 최고층 건물 타이틀과 함께 랜드마크라는 상징성을 확보할 수 있다. 문제는 수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건립 비용이다. 정 회장은 2017년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를 찾아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으로부터 초고층 빌딩 건립에 대한 조언을 듣기도 했다.

GBC 건립 사업은 그동안 군의 작전 방해 논란과 인근 주민에 대한 일조권 침해 논란 속에서 땅을 매입한 지 6년 만인 2020년 5월에야 서울시의 착공 허가를 얻었다. 2026년 하반기 준공 일정이다. 업계에서는 현대차그룹이 GBC 층수를 낮춰 2~3개 동으로 짓는 설계 변경을 통해 공사비를 최대 2조원 정도 절감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층수를 낮추면 초고층 건물을 지을 때보다 공기를 대폭 줄일 수 있고 외부 투자자 유치에도 유리할 것으로 전망된다.

정 회장은 친환경차, 도심 항공 모빌리티(UAM), 로보틱스 등 미래 사업에 집중하며 현대차그룹을 전통적인 자동차 제조 기업에서 ‘스마트 모빌리티 솔루션’ 그룹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GBC 기본 설계는 세계적인 건축 설계 회사 미국 스키드모어오윙스앤드메릴(SOM)과 NBBJ가 진행하고 있고 SK그룹 사옥인 서린빌딩을 설계한 김종성 건축가가 설계 책임을 맡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GBC가 ‘정의선 시대’를 상징하는 만큼 타워에 미래 신사업의 핵심인 UAM 이·착륙장을 마련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뿐만 아니라 현대차그룹은 미래 모빌리티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2025년까지 미래차 분야에 100조원 이상을 투자할 계획도 세웠다. 현대차그룹이 미국의 로봇 기업 보스턴다이내믹스를 1조원 규모에 인수한 것처럼 공사비를 절감해 인수·합병(M&A)에 투자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와 갈수록 치열해지는 미래 모빌리티 시장 선점 경쟁 속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지속적인 투자가 필수적이다. 다만 서울 강남구와 주민들이 GBC의 경제 효과와 지역 발전을 이유로 당초 계획인 105층으로 지어 달라며 설계 변경을 반대하고 있어 갈등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마천루 가고 실용의 시대 왔다’ 100년 대계 신사옥 규모 축소하는 이유
분당두산타워, 친환경 에너지 기업 상징
두산그룹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있는 분당두산타워의 준공을 마치고 2021년 1월부터 두산중공업·두산인프라코어의 일부 부서와 (주)두산·두산밥캣·두산큐벡스 등 계열사들이 순차적으로 입주를 시작했다. 3조원 규모 자구안 이행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두산그룹은 해상 풍력·수소 등 미래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두산그룹의 신사옥은 친환경 에너지 기업으로의 새로운 도약을 의미한다.

두산그룹이 분당에 사옥을 세운 이유는 동대문에 있는 두산타워의 공간 제약 때문이다. 동대문 두산타워의 사무 공간이 협소해 그동안 모든 계열사가 입주하지 못하고 일부 계열사가 각지에 따로 흩어져 있었지만 이번 신사옥 건립으로 흩어져 있던 계열사들이 분당에 집결하면서 동대문과 분당 두 곳에 사옥을 두게 됐다.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은 양쪽 집무실을 오가며 업무를 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분당두산타워는 부지 면적 8943㎡, 총면적 12만8550㎡, 높이 119m의 지상 27층, 지하 7층 규모로 건립됐다. ‘바람개비’를 기본 개념으로 사우스(South)와 노스(North) 2개 동으로 나눠졌고 상단부가 스카이브리지로 연결된 것이 특징이다. 어린이집·피트니스센터·직원식당·대강당 등 직원용 편의 시설과 리모트 오피스, 비즈니스센터 등 협업 공간을 갖췄고 사우스 4층에는 두산의 역사를 소개하는 역사관이 자리잡았다. 분당두산타워는 입주 계열사 간 업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동선과 공간 효율성을 높이고 친환경 에너지 사업에 박차를 가하는 기업 특성을 살려 건물 곳곳에 친환경적 요소를 가미해 설계됐다.

건축물 전체 조형에서도 두산그룹의 ‘ㄷ’을 연상할 수 있는 사각형의 아치 형태로 그룹의 상징성을 반영했다. 두타면세점과 부산 두산위브더제니스 설계를 맡았던 간삼건축이 이번 분당두산타워의 기본 설계 및 실시 설계를 맡았고 미국 시카고의 333웨스트 웨커 드라이브, 일본 롯폰기힐스, 서울의 삼성 서초사옥과 롯데월드타워를 설계한 미국 초고층 전문 건축 설계 업체인 KPF(Kohn Pedersen Fox Associates)가 계획 설계를 맡았다.
‘마천루 가고 실용의 시대 왔다’ 100년 대계 신사옥 규모 축소하는 이유
G타워, 첨단 IT 산업 메카 ‘구로의 랜드마크’
넷마블은 서울 구로에서 신사옥 시대를 연다. 본사와 계열사를 신사옥에 집결시켜 시너지를 극대화할 방침이다. 방준혁 넷마블·코웨이 의장은 신년사에서 “2021년 신사옥 이전을 계기로 넷마블은 재도약할 것”이라며 지난해와 같은 경영 목표인 ‘강한 넷마블, 건강한 넷마블’을 거듭 강조했다. 넷마블은 구로 신사옥인 ‘G타워’에 2월 셋째 주부터 개발 자회사와 계열사·코웨이·넷마블 순으로 입주해 회사 창립 기념일인 3월 1일 이전에 입주를 완료할 예정이다. 신사옥에 입주하는 임직원 수는 계열사를 포함해 6000여 명에 달한다.

넷마블이 약 4000억원을 투입한 G타워는 지상 39층, 지하 7층, 전체 면적 18만㎡ 규모로 건립됐다. G타워라는 이름은 구로 디지털단지(Guro)·게임(Game)·글로벌(Global) 등 넷마블과 연관된 단어의 영문 공통 이니셜인 ‘G’를 따온 것으로 알려졌다. 넷마블은 엔씨소프트와 넥슨 등 판교테크노밸리에 모여 있는 게임사들과 달리 유일하게 구로에 터를 잡았다.

방 의장은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이곳에서 사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만큼 구로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방 의장은 2000년 구로에서 자본금 1억원, 직원 8명으로 게임 회사인 넷마블을 시작해 3조원대 재산을 일군 대표적인 자수성가형 최고경영자(CEO)다.

방 의장은 2016년 서울시와 ‘G밸리 지스퀘어 개발 사업’ 업무협약식에서 “제가 자라고 난 동네에 좋은 상생을 하게 돼 감회가 깊다”며 “넷마블 사옥이 첨단 정보기술(IT) 산업의 메카가 되는 것에 더해 지역 주민과 상생할 수 있는 시설로도 부족하지 않도록 힘쓰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방 의장은 2019년 인수한 코웨이에 넷마블의 IT 를 접목해 스마트 홈과 구독 경제에서 시너지를 창출할 계획이다.

엔씨소프트도 8377억원을 들여 경기 성남시 판교구청 부지에 신사옥 건립 부지를 확보했다. 엔씨소프트는 이곳에 글로벌 연구·개발혁신센터를 건립해 글로벌 시장에서 혁신을 주도하는 제2사옥으로 사용할 계획이다. 펄어비스는 경기 과천 지식정보타운에 신사옥을 짓고 있다. 코로나19로 게임업계가 언택트(비대면) 시대의 대표적인 수혜 업종으로 호황을 누리면서 2020년 3N(넥슨·엔씨소프트·넷마블)은 사상 최대 매출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코로나19로 인한 호실적과 게임 산업의 지속적인 성장세, 미래 사업 육성에 따라 게임 회사들의 신사옥 건립이 잇따르고 있다.
‘마천루 가고 실용의 시대 왔다’ 100년 대계 신사옥 규모 축소하는 이유
DL그룹 신사옥, 글로벌 디벨로퍼 도약대
대림그룹은 창사 82주년인 2021년 1월 지주사 체제로 공식 출범하면서 지주회사 사명을 대림에서 ‘DL’로 변경했다. 대림산업 건설사업부는 DL이앤씨(DL E&C), 석유화학사업부는 DL케미칼로 분할했다. 계열사인 대림에너지·대림에프엔씨·대림자동차도 각각 DL에너지·DL에프엔씨·DL모터스로 사명을 변경했다.

DL그룹은 건설·석유화학·에너지 등 그룹의 역량을 집중해 각 분야별로 디벨로퍼 사업을 적극 추진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특히 건설과 석유화학은 기업 분할을 통해 산업별 특성에 맞는 개별 성장 전략을 추진할 예정이다. 그룹의 새로운 비전에 맞춰 서울 광화문 수송동 대림빌딩에서 서울 종로구 D타워 돈의문 빌딩으로 사옥을 이전했다.

종로구 수송동 대림빌딩과 D타워 광화문에서 근무하던 DL E&C 임직원과 남대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근무하던 DL케미칼·DL에너지 등 계열사 임직원들이 D타워 돈의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D타워 돈의문은 지하 7층~지상 26층, 총면적 8만 6224㎡ 규모다. DL그룹 계열사 6곳, 임직원 약 3000명이 새로운 사옥에서 그룹의 역량을 집중해 지속적인 혁신과 신시장을 개척, 글로벌 디벨로퍼로 도약할 방침이다.

DL그룹은 1939년 인천 부평역 앞 ‘부림상회’로 창업해 지난 81년간 서울 용산구 동자동·광화문 등으로 자리를 옮겨 가며 혁신과 성장을 거듭해 왔다. 1947년 사명을 대림산업으로 변경하며 본격적으로 건설업에 진출했고 1954년 대림산업의 동자동 서울지점 자리에 당시 고층 빌딩에 속하는 4층 건물을 건립해 1967년부터 본사로 사용했다. 1976년 수송동 대림빌딩을 준공해 44년간 사옥으로 사용하면서 혁신과 성장의 역사를 일궈 왔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