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태풍이 지나자 하늘이 파랗다. 눈이 시리어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다. 가을이다. 고향 생각이 난다. 어릴 때, 추석 전날 아버지가 뒷동산에서 따온 싱싱한 솔잎을 대바구니 가득 뽑아 담으시면 어머니는 하얀 쌀가루를 떡 방앗간에서 빻아 와 가족들과 둘러앉아 송편을 빚으며 웃던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고향도 다 도시로 변한 지금 영원한 마음의 고향, 한국의 전통마을로 답사를 가자. 관가정(觀稼亭)!관가정은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있다. 경주에서 형산강을 따라 포항행 7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28번 국도를 만나 영천방향으로 좌회전하자마자 얼마 가지 않아 기계천 둑 가를 끼고 접어들면 멀리 한옥의 고가가 산등성이에 죽 펼쳐진다. 그곳이 양동이다. 마을 입구 왼쪽 산등성이에 당당히 자리 잡은 고택이 보물 442호 관가정이다. 경주에서 지척이요, 포항에서도 금방이다. 이곳 양동은 흔히 ‘양동마을’이라 불리는데 안동의 하회마을과 더불어 양동마을은 조선 오백년 올곧은 유교 선비 문화의 원형을 오늘까지 고스란히 보존한, 몇 안 되는 전통 한옥 마을이다.양동은 마을 전체가 수려한 풍광을 의지한다기보다는 물(勿)자 형국의 산세를 보고 터를 잡았다. 하회마을처럼 낙동강의 수려한 강 풍경도 없고 마을을 대표하는 경관도 없다. 하지만 이곳에서 조선 오백년 동안 문과 26명, 무과 14명, 사마 76명 등 모두 116명이 과거 급제하고 음직(蔭職)은 부지기수로 많은 인물이 배출됐다. 양동마을은 손씨(孫氏)와 이씨(李氏) 두 씨족의 마을이다. 마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 말 여강 이씨 이광호(李光浩)가 처음 정착해 손자사위인 풍덕 류씨 류복하(柳復河)가 처가를 따라 이곳에 왔다. 이어 세조 5년(1459) 문과에 급제하고 중앙 정치에 입문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계천군(鷄川君)에 봉해진 월성 손씨 손소(孫昭, 1433~84)가 류복하의 무남독녀에게 장가들어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으면서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그 후 이광호의 5세 종손인 이번(李蕃)이 손소의 외동딸에게 장가들어 양동에 뿌리를 내리니 이 마을은 손씨와 이씨가 함께 세거하기 시작했다.손씨 집안에서는 손씨의 둘째아들로 벼슬이 정2품 우참찬에까지 오르고 학문이 뛰어나 경주 동강서원(東江書院)에 배향된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 1463~1529)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오고, 이씨 가문에서는 이번의 맏아들로 동방오현 가운데 한 사람인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2~1553)이 태어났다.마을의 주산인 설창산(雪蒼山) 문장봉에서 뻗어 내린 네 줄기 갈라진 능선과 골짜기-내곡, 물봉골, 거림, 하촌에 손씨와 이씨들이 대를 이어 경쟁하듯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짓고 하인들과 서민들의 뒷동산 같은 초가들은 뒷산의 우거진 숲과 어울려 자리 잡았다. 내곡의 높직한 언덕 위로 손씨의 대종가인 서백당(書百堂)이 자리하고 물봉골의 밝은 산기슭에는 이씨 대종가인 무첨당(無堂)이 있는가 하면 마을 어귀 언덕바지에는 이씨의 파종가인 향단(香壇)이 있고, 형산강 너른 들을 굽어보며 손씨의 파종가인 관가정이 반듯하게 서 있다. 관가정은 손소의 둘째아들 우제 손중돈이 분가하면서 1480년대 지은 한옥(韓屋)이다. 양동마을 입구 버스정류장 종점 앞 허름한 슬레이트 구멍가게를 지나 왼쪽으로 반달 논을 끼고 오르면 오른쪽에 향단이 위엄을 갖추고 규모를 자랑하듯 버티고 있다. 그 왼쪽으로 작은 고샅을 올라 두어 채 초가를 지나 언덕에 이르면 비로소 관가정이 보인다. 언덕바지에 수령이 이삼백년은 족히 됨직한 은행나무 한 쌍이 말없이 가문의 이력을 보여주고 있다. 고목의 아름다움은 풍만하게 잘생긴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둥치와 가지는 비바람에 비틀리고 꺾였지만 든든한 뿌리와 굳건한 기둥에 말할 수 없이 서려 있는 세월의 무게에 있다. 나이가 최고의 미감인 셈이다.이제 많이 쇠락해 그 옛날의 아름다운 자태가 사라진 관가정에서 오늘까지 빛을 잃지 않은 것은 은행나무뿐만 아니라 그 옆의 회화나무도 마찬가지다. 은행나무는 공자가 제자를 가르칠 때 은행나무 아래에서 가르쳤다는 데서 유교의 상징목으로 성균관과 향교 및 서원에 심어졌다. 이에 비해 회화나무는 꽃이 과거 급제자의 어사화로 쓰여서 과거에 등용되는 선비의 꿈을 상징하는 선비나무로 잘 알려져 있다. 아마도 우제가 분가할 때 아버지 손소가 아들의 입신양명을 기원하며 심지 않았을까. 추측만 해도 아름다운 부정(父情)이 느껴진다.나는 은행나무 아래에서 잠시 가을바람을 쐬며 발아래 양동초등학교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보았다. 너른 경주평야에는 가을이 한창이다. 저 초등학교 운동장에 추석 다음날 만국기가 펄럭이며 가을운동회로 아이들 함성이 온 양동마을을 울리겠지 생각하다가 발길을 돌려 관가정을 올랐다. 관가정은 정자가 아니라 우제 손중돈의 사가(私家)다. 사랑채 누마루에 관가정이라는 당호를 붙여 집 전체를 관가정이라 부른다. 단정한 ‘ㅁ’자형 종가로 후원 곁에 사당을 두고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기둥의 높이를 차별해 내당의 위계를 세웠다. 관가정 안채 여섯 칸 대청마루에 동해에서 떠오르는 아침햇살이 깊숙이 들어올 때 사각기둥과 사각마당, 높낮이가 다른 기와지붕의 음영이 빚어내는 하모니는 일품이다. 마당의 넓이가 가로 4.8m, 세로 6m로 작은 편이지만 후원을 향해 난 대청판문을 열어두면 자연이 마당 가운데로 들어오고, 형산강 시원한 바람이 네모반듯하게 뚫린 하늘지붕에서 집안으로 불어 들어와 후원 떡갈나무 숲으로 흩어진다. 여름에 매미소리에 백부채라도 들고 마당에 물이라도 끼얹으면 더위는 절로 지나갈 듯하다.안채 대청마루 어간 댓돌 위로 작은 배 모양의 구멍이 하나 뚫려 있다. 구멍의 크기는 가로 18cm, 세로 7cm로 두꺼운 마루 송판을 끌로 파낸 자국이 선명하다. 사용한 흔적이 역력해 구멍 주위가 반질반질 닳아 있다. 나무의 연대로 보아 이 집을 처음 지을 당시에 뚫어놓은 듯한데 도무지 용도를 알 길 없어 궁금하다. 그저 막연한 추측이 내당 마님의 이동식 화장실이 아니었을까. 요강이 있기는 하지만 마루 위에 두는 게 보기에 좋지 않아 댓돌 부근 마루 아래 손이 닿을만한 곳에 요강을 두고 마루 위에서 작은 볼 일을 보는 일종의 실내화장실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어느 해 여름 상주 대산루 우복 종가의 사랑 누마루 위에 이와 비슷한 타원형 구멍을 보고 용도에 대해 같이 답사 갔던 ‘문헌과 해석’ 학자들과 갑론을박 장님 코끼리 더듬기식 토론을 한 적이 있다. 그때도 결론 없이 지났는데 다시 관가정 내당 대청마루 구멍을 보니 의문이 확신으로 변한다.관가정 사랑 누마루에 올라 동남간에 일망무제로 트인 형산강 너른 들을 바라본다. 사대부 호연지기가 느껴진다. 양동마을 건너 반듯한 삼각형의 산봉우리 하나가 새롭다. 한참을 바라보았다. 볼수록 따뜻하다. 풍수에서 문필봉이라 귀하게 여겼던 전형적인 산형이다. 추석날 보름달이 저 봉우리 위로 둥두렷하게 떠오르고 교교한 달빛이 양동 앞 너른 경주평야에 내리면 주인의 심사는 어떠했을까. 주안상이라도 내어 오랜만에 식구들과 앉아 지난여름의 이야기를 나누면 어느새 밤이 깊고 달은 중천에 솟아 온 세상을 환히 비추일 것이다. 임술년 추칠월 기망(旣望) 동파 소식(蘇軾)의 적벽부에 나오는 밝은 달이 아니어도 관가정 언덕 위로 떠오른 보름달 또한 세상을 환히 비추이겠지. 관가정은 조선의 자연과 유교 철학에 부합해 지은 걸작이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 자연 환경과 잘 적응된 자연 친화적인 한옥이다. 조선의 자연은 전 국토의 70%가 산으로 구성돼 있고 여름과 겨울의 온도 차이가 심하면 사오십도를 오르내린다. 나무가 여름에는 습기를 먹어 늘어나고 겨울에는 건조하여 줄어들어 못질을 하면 갈라져 버린다. 이런 이유로 쇠못하나 쓰지 않고 짜맞춤 기법으로 완성하는 목조 건축이 바로 한옥이다. 소나무는 일찍이 주변에서 구하기 쉽고 하중에 잘 견디며 무늬가 아름다워 널리 사랑받아 왔다.조선의 통치 철학인 유교는 자연 친화적인 삶을 바탕으로 인문과 과학을 발전시켰다. 겨울철 차가운 북서풍을 막는 방한으로 온돌이 발달했고 여름의 고온다습한 장마를 피해 대청이 경영됐다. 조선 태종 때부터 시행된 내외법(內外法)으로 남녀의 거주 공간이 확연히 구별됐다. 한 집 울타리 안에서도 남자들은 사랑채에서 글공부와 손님맞이를 하였고 부인은 내당에서 안살림과 자녀 교육을 도맡아 했다.경주를 다녀온 다음날 아침 마당에 나오니 추규화(秋葵花)가 소담스럽게 피었다. 여름내 닭 발톱 같이 뻗은 이파리가 보기 좋더니 팔월이 갈 무렵부터 한두 송이 피던 꽃이 이젠 마음먹고 보란 듯이 피어난다. 목화 꽃같이 수줍게 피어나는 추규화는 아침에 피어 저녁에 진다. 선비 같은 우아함에 옛 문인들의 사랑을 한껏 받았다. 맨드라미도 가을빛에 붉게 익어가고 국화도 송이마다 노란 속을 보이고 있다. 추규화 위로는 꽃사과 나뭇가지마다 사과가 빨갛고 파랗게 색이 섞이어 여리게 매달려 있다. 좋은 가을이다.최선호(崔善鎬) www.choisunho.com1957년 청주생. 서울대 회화과 및 동 대학원 졸업. 간송미술관 연구원.뉴욕대(NYU) 대학원 졸업. 성균관대 동양철학 박사과정 수료.현재 국립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화가 .표화랑 갤러리 현대 등 국내외 개인전 17회 및 국제전 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