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서양 미술에서 전통적으로 고유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지만 에로티시즘을 강조한 그림에서는 상징성이 사라지고 남성을 의미한다. 여성과 동물을 함께 그려 넣음으로써 남녀 간의 직접적인 성적 결합을 보여주는 것이다.뱀은 전통적으로 사악한 동물을 의미하고 있지만 존 콜리어(1850~1934)의 ‘릴리트’에서 뱀은 여성과 사랑에 빠진 남성을 의미한다.유대 신화 속에 나오는 릴리트는 태초에 이브가 생겨나기 전에 아담의 여자다. 이브처럼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지지 않고 흙으로 빚어졌다. 아름다우면서도 섹시한 여자 릴리트는 정숙한 아내의 자리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녀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던 아담은 광풍 앞의 촛불처럼 음탕한 릴리트의 유혹에 끌려 다녔다. 이를 걱정한 하나님은 아담을 보호하기 위해 릴리트에게 벌을 내려 낙원에서 추방해 버린다. 그리고 아담에게 이브를 선사한다.낭만파 시인 키츠는 ‘라미아’에서 남자를 유혹하는데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잔인하게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여자 릴리트를 황금빛과 초록빛, 그리고 청색의 무늬가 있는 뱀으로 비유했다. 키츠의 이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존 콜리어는 릴리트와 뱀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묘사함으로써 릴리트를 팜므파탈의 이미지로 표현했다.뱀은 인간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동물이지만 뱀과 여자를 연결하면 성적인 이미지를 연출할 수 있었다. 존 콜리어는 시각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해 여자와 뱀을 그려 넣었고 그것은 관람자에게 강한 자극을 주고 있다.이 작품에서 아름다운 육체를 소유하고 있는 릴리트는 뱀에게 몸을 감긴 채 황홀경에 빠져 있다. 어둠의 자식이자 악의 상징인 뱀과 아름다운 여체를 하나로 묶은 것은 여자라는 존재가 천사의 모습과 사탄의 모습을 지녔다고 생각해서다.여성의 존재가 양면성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빅토리아 시대의 산물이다. 여성은 가정에서만 그 존재가 인정되었던 시절에 남자를 유혹하고 파탄으로 이끄는 여자의 대명사가 릴리트다. 존 콜리어는 이 작품에서 릴리트의 유혹을 갈망하면서도 거부하고 싶은 남자의 이중성을 표현하기 위해 동물원에서 뱀을 관찰했다고 한다.신화나 전설을 통해 에로티시즘을 표현하던 방식이 18세기에 들어와서는 에로틱한 감정을 솔직하게 나타내기 시작한다. 상상의 세계가 아닌 현실에 있는 여성의 모습을 통해 자유롭게 에로티시즘을 표현했다.일상생활에서 가장 가까운 동물은 강아지다. 전통적으로 강아지는 정절을 나타내는 동물이지만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1732~1806)의 ‘강아지와 함께 있는 소녀’는 소녀의 유혹을 표현한 작품이다.강아지와 함께 놀고 있는 소녀의 모습은 천진스러워 보이지만 소녀의 유희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짓이다. 침대에 반쯤 옷을 벗고 누워 다리를 무릎 위까지 올리고 있는 소녀의 농염한 포즈는 자신의 은밀한 곳을 보이고 싶어 하는 심리가 엿보인다.이 작품에서 강아지의 꼬리가 소녀의 은밀한 곳을 덮어 가려주고 있지만 그 모습이 더 선정적이다. 강아지가 소녀의 무릎 위에서 소녀와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고 머리에 단 리본도 소녀와 강아지가 같지만 이것은 사람과 동물의 교감을 표현한 것은 아니다. 강아지와 시선을 맞추고 있는 소녀의 눈빛은 유혹하는 여자다. 이 작품에서 침대 밑에 떨어져 있는 핑크색의 드레스는 사랑이 시작되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다. 프라고나르는 로코코 시대의 화가로서 노골적이고 선정적인 작품을 주로 그렸다. 이 작품에서 소녀의 침대 위에 쳐 있는 풍성하고 붉은 밤색 천(천개)은 여성의 자궁을 상징하고 있다. 천개가 벌어져 있다는 것은 소녀가 사랑을 시작하고 싶어 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동물은 남성을 상징하지만 구스타프 쿠르베(1819~77)의 ‘앵무새와 함께 있는 여인’에서 앵무새는 고유의 상징성도 남성도 의미하지 않는다.아라베스크 커튼이 쳐 있는 방안에 벌거벗은 여성이 침대 위에 누워 있다. 구겨진 침대 시트 위에 편안하게 누워 있는 여인은 앵무새와 놀고 있다.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는 일상의 편안함을 나타낸다. 커튼 사이로 풍경이 살짝 보이지만 어둡게 처리해 여인의 매끄러운 하얀 피부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갈색 톤의 이 작품에서 앵무새의 깃털만 색조를 띠고 있다.아라베스크 문양의 커튼이 드리워져 있지만 여인은 오달리스크가 아니라 평범한 여인이다. 쿠르베의 누드화는 철학적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그는 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해 누드화만큼은 철저하게 부르주아 취향에 맞춰서 제작했다. 쿠르베의 누드화는 그의 정치적 신념이 나타나지 않으며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쿠르베의 후기 누드화의 대표적인 이 작품은 1866년 살롱전에 출품됐으나 흐트러진 여인의 머리와 긴장감 없는 여인의 자세에 비평가와 보수적인 사람들은 비난을 퍼부었다.박희숙화가. 동덕여대 졸업. 성신여대 조형산업대학원 미술 석사.저서 ‘그림은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