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북부 워싱턴 주의 작은 마을에 6·25전쟁 고아로 입양된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세계를 누비는 최고의 비올리스트로 성장하기까지 그의 성장 스토리는 말 그대로 하나의 ‘인간극장’이다. 지금의 리처드 용재 오닐을 있게 한 다섯 가지를 향해 그가 ‘스페셜 생스(Special Thanks)’를 보낸다.재(勇材). 용감하고 재주 있는 청년이라는 의미에서 세종솔로이스츠의 강효 교수가 지어준 이름이다. 줄곧 리처드라는 이름으로 살아오다 용재라는 이름을 얻게 된 그는 어머니의 고향인 한국과 요즘 부쩍 가까워졌다. 음악, 그리고 비올라를 통해서 말이다. 2008년 한 해를 앙상블 디토 활동과 런던필과의 협연, 그리고 4집 솔로 음반인 ‘미스테리오소’ 준비 등으로 누구보다 바쁘게 보냈던 용재오닐. 오는 2월에 새 음반 관련 공연을 앞두고 있는 그를 숙소인 서울 조선호텔에서 만났다.사실 기자가 공식석상이 아닌 곳에서 용재오닐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얼마 전, 코트를 여밀 정도로 추웠던 겨울의 어느 날. 강남 대로변에 반소매에 반바지를 입고 땀에 흠뻑 젖은 사나이가 조깅을 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눈에 확 들어오는 모습. 자세히 바라보니, 다름 아닌 용재오닐이었다. 연습을 하지 않을 때는 주로 운동을 하는 운동 마니아라고 하더니 그 말이 틀리지 않았구나 하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에서 용재오닐의 강한 의지력을 전달 받을 수 있었다.고행(?)같은 운동 효과 때문인지 인터뷰에 나온 용재오닐의 모습은 생각보다 샤프했다. 몸에 딱 맞는 슬림한 슈트를 입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점심을 바나나 하나로 때워서인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 국내 케이블 채널에서 실시한 ‘스타일 아이콘’에 당당히 뽑힌 그는 몰라보게 스타일리시해진 모습이다. 게다가 개구쟁이 같은 살인 미소라니. 나이를 막론하고 여성 팬이 많은 이유를 알 것도 같다.“아, 조깅하고 있을 때 저를 보셨군요. ‘거기 서!’ 한번 해보지 그러셨어요.(웃음) 조깅은 체력 관리를 위해 어려서부터 꾸준히 해 오던 운동이죠. 한국에 오면서는 마라톤에 참가해 보려고 알아보기도 했어요. LA에 있을 때에도 12~13km를 매일 달렸을 정도죠. 한국에 와서도 1주일에 세 번 정도는 짧게 뛰고 한 번은 길게 뛰면서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어요. 조깅을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좋아하는 빅맥을 마음껏 먹기 위해서죠.(웃음) 운동을 하고나면 빅맥을 먹어도 된다는 혼자만의 허락을 받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기분이에요.”무대에 한번 서려면 대단한 체력 소모를 감당해내야 하기 때문에 그에게 체력 관리는 필수적이다. 작은 비올라를 켠다고 힘이 덜 드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연주를 할 때 모든 에너지를 쏟아낸다. “관객들을 열중하게 하며 마음을 읽는 강렬한 공연”이라는 뉴욕타임스의 코멘트가 그것을 증명한다.얼마 전 기자가 피아니스트 임동혁을 인터뷰할 때 그가 한 말이 기억났다. 앙상블 ‘디토’의 멤버로 용재오닐과 함께 활동하는 임동혁은 ‘존경하는 인물’을 묻자 용재오닐을 언급했다. 용재오닐은 임동혁이 알고 있는 ‘자기 관리에 가장 능한 사람’이라고 했다.“전 또래 친구들보다 빠른 나이인 열다섯 살에 집을 나와 독립했어요. 아무도 날 케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걸 혼자 해나가야 했죠. 가이드가 없는 인생을 좀 더 빨리 시작했다고 할까요. 다른 아이들이 부모의 가르침을 통해 세상을 배워갈 때 전 실수를 통해 모든 걸 깨우쳤죠. 정신적으로 장애를 지닌 어머니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보다 어른스러워진 것 같기도 해요. 저 자신에게 엄격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죠. 동혁은 이런 시행착오 후의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자기 관리를 잘한다고 느꼈을 거예요. 타고났다기 보다는 필요에 의해 갖춰진 능력이라고 봐주세요.”그는 자신을 나타내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다. 혹자가 그에게 동정어린 시선을 보낼 때면 그는 더욱 심지 굳은 모습으로 전진한다. 6·25전쟁 때 미국에 입양된 어머니의 가족을 찾는 내용의 TV 프로그램 ‘인간극장’을 통해 대중에게 얼굴을 알린 그는 얼마 전 자신의 인생을 담은 에세이 ‘공감’을 출간하기도 했다.“사람들은 모두 다른 이유로 내게 관심을 보이곤 하죠. 어머니 이야기를 하며 동정을 보내는 분도 있지만, 난 어머니가 자랑스러워요. 그리고 다른 것엔 신경 쓰지 않는 편이죠. 모든 사람은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요. 저 같은 경우엔 무대에서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이면에선 외로워하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모두들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해요.”자신은 ‘스타’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는 겸손하고 따뜻한 청년 용재오닐. 지금의 그를 있게 한 다섯 가지 요인이 무엇이냐고 묻자,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던 것들을 술술 풀어낸다.“특별한 순서는 없어요. 첫째는 내 가족이죠.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는 변함없는 사랑과 후원을 보내주고 나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해 주셨어요. 두 번째는 멘토, 날 믿어준 사람들이죠. 강효 교수님을 비롯해 줄리아드의 프레드 셰리 교수님이 그 분들이죠. 세 번째는 후원자들, 내 재능을 믿어준 사람들이에요. 그분들은 금전적으로 절 도와주시고 악기를 대여해 주는 방식으로 제게 후원을 해주죠. LA에 멘델스존이란 분이 계신데 강의하러 UCLA에 갈 때면 이 분 집에 머무르곤 해요. 가족과 다름없죠. 네 번째는 고난과 힘든 시간들입니다. 어렸을 때 경제적 독립을 해야 했기 때문에 무척 힘들었어요. 17달러를 가지고 1주일을 버텼죠. 매일 맥도날드에 가야 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값진 추억입니다. 다섯 번째는 친구들이에요. 어려서 독립한 제게 고등학교 친구들은 가족과도 같은 존재입니다.”커리어를 쌓느라 연애할 생각도 들지 않는다는 이 청년의 전 재산은 앤티크 비올라 한 대뿐이다. 이탈리아의 조반니 토노니(Giovanni Tononi)가 제작한 1699년산 비올라는 그가 5년 전쯤 학생 때, 대출을 받아 큰맘 먹고 구입한 것이다. “당시로선 가장 큰 투자를 한 것이고, 아직도 대출금을 갚고 있지만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 아마도 지금 이걸 판다면 벤틀리 포르쉐 등 최고급 자동차를 몇 대나 살 수 있을 걸요?(웃음)”이젠 그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애인’ 비올라와 함께 세계 최고의 비올리스트가 될 날도 그리 머지않은 것 같다. 고학과 고행, 그리고 고독을 거쳐 이제 막 펼쳐진 아름다운 그의 미래에 진심어린 축복을 보낸다.본명 Richard Yongjae O’Neill1978년 미국 출생줄리아드 아티스트 디플로마 졸업2000년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협연으로 데뷔2004년 5월 KBS ‘인간극장’에서 어머니 이복순 씨와 함께 재미 비올라 연주가로 첫 소개2006년 미국 클래식의 최고 권위 있는 상인 ‘에이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 어워즈’ 수상2007년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 입성2008년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협연세종솔로이스츠 솔리스트링컨센터 체임버 뮤직 소사이어티 단원글 김지연·사진 이승재 기자 jykim@money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