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눈 속에 연꽃은 없었다普光의 거품인 양눈곱 낀 눈으로 게가 뻐끔뻐끔 담배 연기를 피워 올렸다눈 속에 들어갈 수 없는 연꽃을 게는, 그러나, 볼 수 있었다황지우 ‘게눈 속의 연꽃’ (문학과지성 시인선 97)년대 대학가에 민주화의 열망과 소요로 학문의 열정이 시위와 구호로 얼룩져 갈 무렵, 난 철없는(그때나 지금이나 철없긴 마찬가지지만, 아니 벌써 쉰!) 대학생, 꿈 많은 젊은이였다. 내가 다니던 미대 앞 광장에 목련이 한 두 송이 피어나고 눈 녹은 봄바람이 관악에서 불어 내려올 때쯤, 등교하는 학생들이 어찌나 눈부셨는지 지금 생각해 보아도 가슴이 설렌다. 멀리 대학 본관이 보이는 길목 목련꽃 그늘 아래서 ‘젊은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는 대신, 난 ‘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 시집을 꺼내 왕유의 시 ‘전원의 즐거움(田園樂)’을 낮은 소리로 읽었다. “분홍빛 복숭아꽃 간밤에 비 머금고, 버드나무 푸른 가지 아침연기 띄웠구나. 꽃잎은 지는데 아이놈은 쓸지도 않고, 꾀꼬리 지저귀는 소리 들리는데 산객은 아직도 꿈속(桃紅復含宿雨 柳綠更帶朝煙 花落家未掃 鶯啼山客猶眠)”봄 새벽에 다시 읽어도 참 좋다. 그때는 헤르만 헤세의 산문과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미학을 읽으면서 무슨 소리인지 모르면서도 즐거웠고, 칸트니 니체니 하는 철학 서적과 이상 김수영 같은 시인들의 시집을 들고 다니며 틈날 때마다 들춰 보곤 했다. ‘장자’ 내편을 읽을 때에는 나도 대붕(大鵬)이 되어 구만리(九萬里) 장천을 날아가는 꿈을 꾸기도 했으니 참으로 즐거운, 아니 철없는 시절의 아득한 기억이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봉천동 남성대 부근 차가운 화실에 친구들과 모여 앉아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로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안주도 없이 빈속에 마신 찬 소주는 밤하늘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꿈은 훌륭한 화가이지만, 그래도 난 인문학이 좋았다. 언젠가 황지우의 시 ‘게눈 속의 연꽃’을 음미하다가 ‘게눈 속에 연꽃’이 피어 있다는 시인의 기막힌 상상력에 정신이 아찔했다. 과연 시인이구나, 시인의 그 뜀뛰듯 발랄한 상상력이야말로 게눈 속에 연꽃도 피워 올리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몇 해 전 계절이 겨울에서 봄으로 바뀔 즈음, 전남 해남 미황사 대웅보전 주초에 새겨진 연꽃 위로 기어오르는 게 한 마리를 보았다. “아! 이거!!” “게눈 속의 연꽃!!!” 풍경은 달랐지만 느낌은 같았다. 우주 끝 가늠할 수 없는 삼라만상의 무변광대함에서 섬광처럼 인식하는 그 찰나의 감각을 나는 정말 무슨 말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아니 설명이 필요 없었다.금강경에 이르기를 본래 삼라만상은 공(空)한 것으로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하였으니 내가 본 것도 모두 헛것일 뿐, 오후 햇살이 깊숙이 미황사 대웅보전 뜰에 내리고 달마산 계곡물이 시내 바위에 부서져 하얀 물방울로 빛난다.미황사는 아름다운 절이다. 남도의 끝 달마산자락에 그림처럼 버티고 서 있는 산풍경이 봄 안개에 숨었다 나타났다 한다. 응진당 뒤 산동백이 수줍은 듯 붉은 빛깔을 피워 올리고 박새들은 이 수풀 저 덤불로 짝지어 날아다니며 초봄 햇살을 만끽한다.봄이 왔다. 달마산 정상은 금강산 만물상 백색 화강암 바위 봉우리의 위용을 이곳 땅 끝까지 밀고 내려온 듯 산봉의 기세가 웅혼하다. 봄비에 아침 안개가 봉우리를 가리니 풍경이 더욱 그윽하다. 북송 화가 곽희는 그의 화론 ‘임천고치(林泉高致)’에서 산수를 인간에 비유해 “수목은 터럭으로, 바위는 골격, 흙은 근육, 안개는 정신으로 삼고 물은 혈액으로 삼는다” 했으니 그 말이 참으로 옳다. 달마산 봄 안개가 딱 그러하다. 산의 정취가 선승의 푸른 기상을 대하는 듯하다. 미황사의 창건 연대나 사적에 대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 권35 영암군 편과 숙종 18년(1692) 당시 병조판서 민암이 비문을 지었다는 ‘미황사 사적비’, 그리고 ‘미황사 대법당 중수 상량문’에 창건 설화와 창건 시기, 조선 후기 중창 및 3차에 걸친 중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미황사 사적비’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 8년(749) 8월에 금빛사람(추측건대 피부색이 다른 서역인을 지칭하는 듯-필자 주)이 아름다운 범패 소리를 울리며 노를 저어 땅끝마을 사자포 앞바다에 나타나 경전과 불상 및 탱화를 의조화상에게 건네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배 안에 싣고 왔던 바위를 부수고 나온 검은 소가 점지한 자리에 절을 세우니 이 절이 곧 미황사가 되었다는 창건 설화를 기록하고 있다. 절 이름을 미황사라고 한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매우 아름다웠다고 해서 ‘미(美)’자를 넣고 금인(金人)의 빛깔에서 ‘황(黃)’자를 딴 것이라 한다. 어느 절이든 창건 설화에 얽힌 고사는 너무도 막연하고 신비스럽기조차 하다. 하지만 이를 두고 진부를 논하기 전에 지리적 특성을 고려해 불교의 전파 과정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즉, 우리나라 불교의 남방 바닷길 전래설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불교는 4세기 말 중국을 통해 한반도 북쪽을 거쳐 고구려에 전파됐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서남 해안지방에는 불상이나 경전 등이 바다를 건너 전해져서 그곳에 절을 지었다는 설화가 많이 퍼져 있다. 그중에서도 미황사 창건 설화는 인도에서 직접 불적이 전래됐음을 말하는 것으로 주목된다. 장거리일 경우 육로보다 바닷길이나 물길이 먼저 발달했던 것과 함께 문화의 동질성이 산맥을 경계로 끊어지고 물길을 따라 이어지는 것에서 미루어 볼 때, 북쪽의 육로로만 불교가 전해졌다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다.창건 이후 수백년 동안의 미황사 사적은 전해지지 않았으며, 선조 30년(1597)에 정유재란으로 절이 소실되자 이듬해에 중건을 시작해 현종 1년(1660) 여름 기와를 구워 가을에 상량함으로써 완공됐다. 3차 중창은 1752년 봄에서 여름에 걸쳐 기와를 굽고 다음해 겨울 보길도에서 아름드리 소나무를 베어 바닷물에 담가 부재의 뒤틀림과 썩음을 방지했다. 주초는 해남 금소에서 새로 다듬는 공사를 했는데 이때 나한전(응진당)과 대웅전을 3월과 4월 봄에 함께 상량했다. 그런 연유로 지금도 대웅보전 주초가 정면에는 연꽃 다듬주초로 되어 있고 측면과 배면은 자연석 덤벙주초가 섞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여러 번의 중창 불사의 연유에서 나온 자연스런 결과물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미황사의 산내 암자는 12개에 달했고 20여 동의 전각들이 운집해 있어 수많은 고승대덕이 주석하고 승풍을 크게 떨친 호남의 주요 사찰이었다. 하지만 이런 미황사도 1880년대 이후 서서히 몰락의 길로 접어들어 근대로 넘어오면서 완전히 쇠락했다. 하지만 역사는 부침하는 것, 인생사 모두 태어나고 성장하고 뜻을 이루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고, 또다시 태어나듯 미황사도 근년에 도량을 정비하고 전각을 새로 세우고 길을 다듬어 선가(禪家)에 일신(日新)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새벽 3시, 달마산 새벽을 깨우는 도량석 소리에 눈을 떴다. ‘똑- 똑- 똑-’ 천천히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낮게 깔리다가 점차 또렷해진다. 사방이 고요하다. 음력 이월열사흘 달이 아직 중천 하늘에 걸려 휘황하다. 봄밤 새벽 창문을 열고 문 밖을 나서니 차고 부드러운 산기운이 피부를 스친다. 코끝이 상큼하다. “계화(桂花)일까? 이 부드러운 향기가 어디서 나지?” 정신이 갑자기 확 든다. 응진당 아래 공양간 요사채를 돌아 대웅전으로 발길을 옮기다 깊고 푸른 하늘을 올려보았다. 달빛 사이로 별빛이 쏟아진다. ‘달빛이 밝으면 별빛이 드물다(月明星稀)’지만 달마산 너머 은하수엔 참 많은 별들이 지나고 있었다.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밤하늘을 하염없이 쳐다보다가 문득 별빛이 하도 밝아 더 보면 별빛에 눈이 서걱거리며 아플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산중은 동안거를 마친 해제철이라 선방이 텅 비어 있었다. 영겁의 세월 속에 천만년을 기약하며 대웅보전 석가모니 약사여래 아미타부처님 성성한 눈빛이 법당 안에 가득하다. 모든 불성을 다 깨우는 종성이 끝나고 새벽 예불이 시작됐다. “지심귀명례… 지심귀명례…” 독송을 하면 할수록 마음은 점점 더 아득해지고 반야심경을 소리 내어 읊을 때엔 내가 지금 심경(心經)을 외는 건지, 심경이 나를 깨우는 건지 알 듯 모를 깊이로 마음은 낮게 내려간다. 새벽 예불을 마치고 고요한 침묵 속 입선(入禪) 죽비소리와 함께 참선에 들었다. 참선은 한 생각 일으켜 생사의 고(苦)를 끊고 열반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선지식의 고행이다. 나는 금강스님이 가르쳐 준 화두인 ‘이 몸뚱아리가 도대체 무엇인가’하는 “이 뭐꼬?”를 화두로 삼아 참선해 보려고 했지만 생각은 생각대로 끝없이 달아나고 흩어진다. 마음은 망상으로 가득하지만, 몸은 고통으로 정신이 없다. 생각 같아서는 금방이라도 자리를 고쳐 앉고 싶었지만 같이 참선하는 도반은 미동은커녕 숨소리조차 없다. 나도 이내 마음을 고쳐 먹고 단전에 힘을 준다. 도무지 쉽지가 않다. 나의 삐쩍 마른 육척(六尺) 몸통이 말초적 고통으로 이렇게 쉽게 정신을 무너뜨릴 수 있느냐 싶어서 이겨 보려고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안으로는 젖 먹던 힘을 다해 버티고, 버텨내고 있어도 소용이 없었다. 얼마쯤 이렇게 비몽사몽 시간이 지났을까. 방선(放禪)의 죽비소리에 그만 내가 놀랐다. 참으로 나라는 존재가 이렇게 미미하구나 하고 새삼 탄식하면서도 정신은 한결 가벼워짐을 느꼈다. 언젠가 한창, 열심히 공부에 열중할 때 종일 책 보고도 몸이 무겁기는커녕 오히려 정신이 선연해고 가벼워짐을 느낀 적이 있다. 세상 공부가 그런 것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달마산 정상에서 정서(正西)로 자리한 대웅보전의 단청하지 않은 빛바랜 기둥의 나무 물결무늬가 곱다. 세월이 지난 것은 모두 아름답다. 그게 세월의 힘이다. 영겁의 세월 속에 가부좌하고 선열(禪悅)에 든 부처님 무릎 위로 새소리 한 다발이 들린다. 대들보 천장 천불부처님과 조사들의 ‘옴마니반메훔’ 합창이 천상의 구름 위로 사라진다. 여기선 이 자리가 바로 깨달음의 자리, 도(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