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여름 미리 준비하기

‘아직 동장군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뭔가 잘못된 제목 아니야?’라고 묻는 당신에게 진정한 멋쟁이는 벌써 내년 봄 시즌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귀띔한다.상에 공짜란 없다.’ 어느 정도 사회적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라면 이 격언의 의미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땀 흘려 노력한 것만이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수 있음 역시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절실하고 느끼고 있을 테니. 패션과 스타일 역시 마찬가지다. 남들에게서 ‘옷 잘 입는다’ 라는 칭찬은 결코 타고난 DNA와 순간의 요행에 의해서 듣게 되는 게 아니다. 계속된 성공과 실패 그리고 끝없는 투자만이 ‘패셔너블한 신사’라는 달콤한 열매를 맛보게 하는 것이다.이제 연말이 지나면 백화점을 비롯해 대대적인 세일이 이어질 테고 -영미권의 박싱데이(12월 26일, 박스에 담아 선물을 한다는 데서 유래) 세일은 연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곧 본격적인 S/S 시즌이 시작될 것이다. 그렇다. 바로 지금부터 내년 시즌 유행할 트렌드와 핫 아이템 그리고 전체적인 패션 경향에 대해 알아봐야하는 것이다. 이렇게 트렌드와 패션을 ‘학습’하려는 태도는 전문가의 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린다. 2010 S/S 컬렉션에서 기초한 내년 상반기 유행할 남성복 경향을 짚어본다.이미 오래전에 끝난 4대 컬렉션을 통해 바라본 2010 S/S 컬렉션의 전체적인 특징은 부드러운 레이어링과 매우 가벼운 슈트 등 자연스러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낡고 소박한 느낌의 옷들이 대세를 이룬다는 것이다. 보테가 베네타나 베르사체, 트루사르디 등이 선보인 캠핑 무드와 레트로 분위기의 패턴, 빈티지한 느낌은 패션 시계의 바늘을 1950년대에 맞추면 된다. 반면 좀 더 젊고 쾌활한 남성들을 위한 캐주얼룩 또한 대거 선보였다. 그 밖에 디스퀘어드와 존 갈리아노, 준야 와타나베 그리고 버버리 프로섬 등이 스포츠 기능적인 부분과 활동적인 아웃도어 룩이 결합한 옷들로 패션 저널리스트의 박수 갈채를 이끌어냈다.다음으로 내년에 유행할 컬러들을 살펴보자. 내년 상반기 남성들의 가장 큰 사랑을 받을 컬러는 누가 뭐래도 밝은 회색일 것이다. 이는 캐주얼 웨어를 새롭게 표현하면서 테일러링이 더 주목 받게 되었고, 편안하면서도 단순한 룩을 창조할 수 있는 그레이 컬러가 디자이너들의 선택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프라다와 언더커버, 캘빈 클라인 등 2010년 봄, 여름 시즌을 위해 소프트한 그레이 컬러를 선택한 디자이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컬러는 남자들이 회피하기 쉬운 색인 화이트, 그것도 눈처럼 하얀 순백의 화이트다. 나일론이나 시스루 소재 혹은 메시 소재 등 지금까지 남자 옷을 만들 때 잘 쓰이지 않던 원단들이 순백과 잘 어우러져 한층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루이비통과 겐조, 질 샌더 등이 2010년의 여름을 하얗게 수놓을 후보들이다.그 밖에 디올 옴므나 에르메네질도 제냐 그리고 던힐 등 전통에 빛나는 남성복 브랜드에서는 아이보리와 스킨 컬러 혹은 본(Bone)컬러나 마치 물을 먹은 듯한 민트 등 뉴트럴 톤 컬러들을 묘하게 접목시킴으로써 세련되면서도 낭만적인 50년대 스타일을 완성시켰다. 이 밖에 레드와 그린 등 컬러풀한 원색들 내년 상반기 나이트 라이프를 위한 포인트 컬러로 제시되었다.체크의 인기는 도대체 언제쯤 식을까. 몇 년 전부터 남성들의 옷장을 점령했던 타탄 체크가 꾸준히 사랑을 받을 게 틀림없지만, 계절을 반영해 한층 밝아진 컬러들이 중첩을 이룰 것이다. 보기에도 시원한 컬러들의 겹침은 한층 캐주얼한 면을 강조해 마치 ‘한여름 밤의 칵테일 파티’에 참석할 수 있는 스타일을 제공할 것이다.체크 원단의 인기가 브리티시 룩에서 온 클래식에 기반을 뒀다면 이번 시즌 가장 흥미로운 소재 중 하나는 메시와 펀칭 효과는 좀 더 펑키하고 록적인 문화에 적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라다와 살바토레 페라가모, 장 폴 고티에와 미국의 신예 디자이너 팀 해밀턴 등이 현대적 감각의 미니멀리즘을 표현하는 데 메시를 적극 활용했다.2010년 시즌의 가장 드라마틱한 소재는 바로 실크와 새틴과 같이 고급스럽고 광택이 나는 것들이다. 이는 현대적인 수트를 S/S 시즌에 어울리는 소재로 선보이기 위해 한층 업그레이드 된 무엇을 찾아 헤매던 디자이너들이 내놓은 해결안인 셈. 어쨌든 이번엔 다른 시즌들보다 한층 가공된 소재들이 적극 사용됨으로써 남성복 시장에서도 고급 브랜드들이 스파 브랜드(H&M이나 유니클로 등)간의 질적 차이가 두드러지게 되었다.원 버튼 더블 브레스티드 슈트는 이번 시즌 가장 ‘핫’한 아이템이다. 장식이 최대한 절제되었고, 니트나 티셔츠와 매치되어 캐주얼하게 표현되는 게 많았다. 라방과 프라다 그리고 에르메네질도 제냐 등 하이 패션 브랜드에서 특히 많이 제안되었는데, 원 버튼 더블 브레스티드 재킷의 유행은 필연적으로 재킷의 길이를 짧게 만들었다. 거의 허리선에서 크롭된 재킷은 박시한 더블 브레스티드 재킷의 실루엣과 결합해 남성복에서도 여성복을 휩쓴 1980년대 룩이 새롭게 부상했음을 느끼게 만들어줬다. 이번 시즌 남성복에서는 대담하게도 슬리브리스 재킷이 눈에 띄고 있다. 칼라가 없거나 앞여밈 디테일을 사용하여 전체적인 느끼함을 덜고 미니멀리즘에 입각한 스타일이지만, 여전히 이런 옷들을 입으려면 큰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이 밖에 간절기에 입을 수 있는 어깨가 둥글려진 박시한 코트들이 세루티와 버버리 프로섬 그리고 지앙 프랑코 페레 등에서 선보였고, 여기에 벨티드 코트들이 가세했다.마지막으로 남들과 다른 패셔니스타들을 위한 아이템! 항상 새로움을 찾아 헤매는 디자이너들은 가죽으로 셔츠를 만드는 일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물론 S/S라는 계절을 고려해 매우 얇으면서도 유연해 마치 원단처럼 재단된 가죽 소재들이지만, 어쨌든 기존의 워싱이나 빈티지한 느낌과는 확연히 다르게 럭셔리하면서도 고급스런 이미지로 가죽을 사용한 건 일종의 ‘콜럼버스의 계란’과 같은 사고의 전환이 있어 가능했다.이번 시즌 가방은 아주 네모난 -자칫 잘못하면 철가방처럼 보일 수 있는 - 박시한 브리프 케이스와 스포티한 무드를 대표하는 백 팩으로 양분할 수 있다. 단 백 팩 역시 기존의 캐주얼뿐 아니라 슈트에도 얼마든지 멜 수 있는 포멀한 스타일로 제안되었다. 슈즈는 앞의 발가락 전체가 노출되는 조금은 글래디에이터 슈즈 같은 샌들이 대거 등장했고, 그 밖에 절제된 디테일의 미니멀한 슬립 온 슈즈들도 큰 사랑을 받을 것이다.결론적으로 2010 S/S 시즌의 남성복은 예년에 비해 한층 풍요로워졌고 흥미로워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아무리 재기발랄한 디자이너라 할지라도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없게 만들던 지긋지긋한 경제 불황이 서서히 그 끝이 보이고 있다는 데 기인한다. 패션 디자이너들 특히 럭셔리 브랜드의 디자이너들은 S/S 시즌임에도 불구하고 여타 내셔널브랜드와 차별을 두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물론 패션쇼에서 선보였던 스타일이 6개월 후 반드시 거리를 휩쓴다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 컬렉션에 기댄 2010 S/S 시즌 남성복 트렌드 예상은 미니멀리즘이 인기를 끌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1990년대의 미니멀한 스타일이 단순히 블랙과 그레이의 조합이었다면 2010년 여름의 미니멀리즘은 화사해졌고 로맨틱해졌다는 크나큰 다름이 있다. 전체적으로는 미니멀한 가운데 세심한 부분들, 액세서리나 디테일 등에서 맥시멀리즘의 터치가 느껴지는 진일보화된 미니멀리즘인 것이다.어쩌면 남자들도 멋쟁이 소릴 듣기 위해선 1년 전 S/S 시즌보다 적극적으로 쇼핑에 몰두해야 할지 모른다. 경험상 미니멀리즘은 진정한 패션 고수들에게 훨씬 우호적인 사조였기 때문이다.글 김현태 패션 에디터·사진 던힐, 살바토레 페라가모, 에르메네질도 제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