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하지만 우아한, 중세시대 부유층의 멋

거대하고 웅장한 성당, 르네상스 양식의 화려한 건물들, 그리고 호수. 유럽 하면 떠오르는 풍경은 대개 이런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유럽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오산. 때로는 화려하게 치장한 여인의 모습을 갖고 있다가도 때로는 소박한 시골 아낙네의 순수함을 간직한 다양한 매력을 지닌 곳이 바로 유럽이다. 그중에서도 벨기에는 고풍스러우면서도 단아한 ‘색다른 유럽의 멋’을 지니고 있는 나라다.
[TRAVEL IN EUROPE] 숨겨진 유럽의 보석, 벨기에
와플이 맛있는 나라. 사실상 ‘벨기에’라는 나라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게 전부다. 그만큼 벨기에는 유럽 여행 꽤나 다녀봤다는 이들에게도 낯선 여행지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프랑스와 독일, 네덜란드 등 유럽의 강호들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 벨기에를 ‘스쳐지나가기’는 쉬워도 정작 찬찬히 둘러보며 ‘벨기에의 속살’을 들여다볼 기회를 갖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유럽의 멋’을 느껴보고 싶은 이들이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여행지가 바로 벨기에이기도 하다. 다소 한적해 보이고 그래서 때로는 유럽답지 않은(?) 촌스러움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촌스러움마저 고풍스러움으로 승화하는 예스러운 건축과 거리 풍경이 어우러진 ‘동화 같은 매력’을 간직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24시간 취할 수 있는, 맥주의 나라
‘Save the water! Drink the beer!(물을 아끼세요. 맥주를 마셔요.)’
벨기에의 첫인상은 바로 이 한 마디에서 결정됐다. 일반적으로 맥주 하면 독일을 먼저 떠올리기 쉽지만, 벨기에야말로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맥주의 천국’이다. 점심 먹으면서도 맥주, 저녁 먹으면서도 맥주, 그리고 밤 문화를 즐기면서도 마찬가지로 맥주와 함께하니 오죽하면 ‘24시간 취해 있는 나라’라는 우스갯소리마저 나올 정도. 그야말로 물보다 맥주를 더 많이 마신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다.

벨기에에서 맥주가 이토록 발달한 데는 이유가 따로 있다. 벨기에 맥주는 중세시대 수도원에서부터 만들기 시작하면서 그 역사가 400년에 이른다. 벨기에 맥주 중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호가든’은 15세기경 벨기에 브뤼셀 동쪽에 위치한 호가든 지방 수도사들의 주조법에서 유례했다고 하니 ‘수도사와 맥주’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독특하면서도 유머 넘치는 벨기에의 맥주 문화를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오랜 역사뿐만이 아니다. 그 종류 또한 무궁무진하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 종류만 2500여 가지가 넘는다. 놀라운 건, 이 다양한 종류의 맥주마다 고유의 색깔과 풍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의 경우 1516년 빌헬름 4세가 맥주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맥주 순수령’을 선포하고 맥주 고유의 맛을 살리는 데 집중한 반면, 벨기에는 이와 같은 규제가 없이 각 지역마다 특색 있는 허브나 과일 등을 사용해 다양한 맛의 맥주를 개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다양한 맛을 더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것이 벨기에만의 독특한 맥주 ‘음용법(ritual)’이다. 수천 가지 종류의 맥주는 저마다 최상의 맛을 끌어내기 위한 전용 잔이 따로 마련돼 있다. 벨기에 어디를 가나 맥주 가게를 손쉽게 만날 수 있는데, 진열장마다 이처럼 다양한 종류의 맥주들이 각각의 전용 잔과 놓여 있는 모습이 꽤나 장관이다.
[TRAVEL IN EUROPE] 숨겨진 유럽의 보석, 벨기에
겐트의 낮과 밤의 모습.
겐트의 낮과 밤의 모습.
벨기에를 여행하다 보면 각 지역마다 대표적인 맥주 공장들을 찾아보고 직접 맥주 맛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적지 않다. 그중 브뤼헤 지역의 대표적인 맥주 공장인 ‘Zot(광대)’는 1층과 2층에 마련된 맥주 펍 외에 따로 견학 신청을 통해 맥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영어, 독일어 등 다양한 언어로 가이드가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맥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들으며 따라 올라가다 공장의 굴뚝이 위치한 옥상에 다다르면 마을 전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은근히 풍겨오는 맥주 냄새에 취해 시원하게 펼쳐진 마을 전경을 바라보는 그 맛이 또한 일품이다.


유럽을 움직이는 심장부, 브뤼셀
브뤼셀(Brussels)은 이 작은 나라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는 수도다. 과거에는 비교적 한적한 도시였으나, 지금은 교외에 있던 18개의 자치시가 병합돼 대도시로 성장했다. 그러나 소박하고 차분해 보이기만 하던 첫인상과는 다르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브뤼셀이야말로 전 세계를 움직이는 국제적인 도시 중 하나다. 브뤼셀 공항에서부터 중심가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유럽연합(EU) 국회의사당을 비롯해 국제기구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EU 국기를 중심으로 만국기가 나부끼는 익숙한(주로 뉴스에서 많이 본)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 뒤에야, 비로소 이 소박해 보이기만 하는 도시가 얼마나 국제적인 곳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브뤼셀을 대표하는 청동상 ‘오줌 누는 소년(마네캉피스)’
브뤼셀을 대표하는 청동상 ‘오줌 누는 소년(마네캉피스)’
브뤼셀은 수백 년 동안 성벽 도시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1818~1840년경 이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둘레 8km의 아름다운 순환도로를 만들었다. 이 넓은 가로수길이 브뤼셀 구시가의 외곽을 형성하고 있다. 개성 넘치는 와플 가게며 초콜릿 가게 등이 즐비한 상업 지구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그랑플라스가 있다. 17세기, 18세기 건물은 물론 중세시대부터 현대까지 각 시대를 대표하는 다양한 건축 양식들이 한데 모여 있어 독특하면서도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근처에는 유명한 ‘오줌 누는 소년(마네캉피스)’ 청동상이 있다. 미리 귀띔하자면, 벨기에를 대표하는 동상이라고 해서 웅장하고 거대한 동상을 기대했다면 실망이 클 수(?) 있다. 그야말로 ‘아기 사이즈’의 매우 조그마한 동상이지만 벨기에를 대표하는 관광 상품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오줌싸개 아기’를 보기 위해 몰려들어 가장 붐비는 곳인 만큼 소매치기가 활개칠 수 있으니 소지품 관리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벨기에는 독특한 지역색을 담은 수천여 가지 맥주를 맛볼 수 있는 ‘맥주의 천국’이다.
벨기에는 독특한 지역색을 담은 수천여 가지 맥주를 맛볼 수 있는 ‘맥주의 천국’이다.
브뤼셀의 상업 거리를 따라 걷다 보면 길모퉁이 한가운데 커다란 돌비석과 마주치게 되는데, 다름 아닌 ‘동성애자들을 기념’하기 위한 비석이라고 한다. 오스카 와일드를 비롯한 유명 인사들의 이름이 이곳에 빼곡히 쓰여 있다. 실제로 이곳에서는 해마다 8월이면 동성애자들의 권리 보장을 위한 ‘대규모 동성애 퍼레이드’가 열릴 만큼 동성애자들의 인권문제를 대표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브뤼셀은 만화의 도시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캐릭터가 소년 기자 틴틴과 그의 강아지 스노위의 맹활약을 담은 ‘틴틴(tintin)’이다. 실제로 브뤼셀 곳곳에서는 벽면마다 틴틴을 비롯한 유명한 만화 캐릭터들을 만날 수 있다. 독특한 브뤼셀만의 색깔을 더하기 위한 정책으로 어느 누구든 마음껏 벽화를 그릴 수 있도록 장려(?)한 덕분에 탄생한 벨기에만의 독특한 거리 풍경인 셈이다. 브뤼셀에서는 수시로 비가 내려 우산을 써야 하는 경우가 많지만, 다양한 색깔을 지닌 고풍스런 도시를 걷다 보면 빗물에 반짝이는 벽화와 길거리마저 화보가 된다.


중세시대 부유층의 삶을 느낄 수 있는, 겐트
전 세계 어딜 가나 한국말이 들리는 요즘이지만 겐트를 여행하는 동안에는 그야말로 한국말은 단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다. 그만큼 겐트는 벨기에 중에서도 한국인들에게는 특히 낯선, 유럽의 숨겨진 보석 중 보석이다. 브뤼셀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는 이곳은 중세시대 운하로 번영했던 무역 도시다. 따라서 예부터 벨기에 지역은 물론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각 지역에서 온 부유층들이 터를 잡고 살던 곳이라고 한다. 지금도 겐트에는 이 같은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 같은 전통이 남아 있는 덕분에 지금도 벨기에에서 손꼽히는 교육 도시로 명성이 높다. 중세시대 이후로 잘 보존된 건물들로 인해 관광산업이 매우 발달해, 유럽 여행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겐트 성바프 대성당 꼭대기에서 바라본 성니콜라스 교회.
겐트 성바프 대성당 꼭대기에서 바라본 성니콜라스 교회.
마을 중앙에 위치한 교회 옆은 부유층의 도시 겐트에서도 가장 부유한 사람들만이 살던 곳이라고 하는데, 마치 저택이라기보다는 궁전에 가까울 만큼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외양을 자랑한다. 재미있는 것은 부유층일수록 교회 예배를 드릴 때 사람이 많은 곳을 기피했던 탓에, 굳이 교회까지 가지 않더라도 저택 내부에서 교회가 잘 보이는 위치에 따로 예배실을 마련해 놓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성니콜라스 교회와 성바프 대성당 광장을 중심으로 도보로 30분 정도면 아기자기한 가게들과 맛집들을 대부분 둘러볼 수 있다. 성당 꼭대기까지 엘리베이터가 준비돼 있어, 힘들이지 않고도 성당 꼭대기에 올라가 겐트의 전경을 둘러볼 수 있다. 화려한 치장을 하지 않아도 차분한 매력을 갖고 있는 도시다.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밝고 경쾌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탓에, 여행자들의 발걸음마저 기분 좋게 만드는 곳이다. 30유로 정도하는 겐트 시티카드를 사용하면 모든 교통수단과 박물관, 관광지를 하루 혹은 이틀 동안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세계 최고의 기차역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안트워프역. 중세시대 건축양식을 담은 화려한 내부 모습이 인상적이다.
세계 최고의 기차역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안트워프역. 중세시대 건축양식을 담은 화려한 내부 모습이 인상적이다.
동화 마을 ‘브뤼헤’와 다이아몬드의 도시‘안트워프’

브뤼헤는 브뤼셀에서 서북쪽으로 90km 정도 떨어져 있는 도시다. 겐트가 보다 고풍스럽고 차분한 분위기라면 브뤼헤는 마치 동화 속 마을처럼 따뜻한 풍경을 자랑한다. 널따란 정원을 지나 과거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건물과 다리를 지나다 보면, 당장이라도 저택 안에서 왕자와 공주가 문을 열고 나올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13세기 중세시대의 아기자기한 저택과 교회를 마치 강물이 품에 안은 듯 감싸고 있는데, 강가를 따라 자리를 잡고 있는 벼룩시장을 둘러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다. 우스꽝스러운 청동 조각상부터 중세 유럽의 멋을 담고 있는 수저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새로운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으니, 눈썰미 꽤나 있는 이들이라면 저렴한 가격에 기상천외한 물건을 구입하는 행운을 누릴 수도 있다.
‘코믹의 도시’답게 브뤼셀 곳곳에서는 만화 캐릭터를 담은 벽화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코믹의 도시’답게 브뤼셀 곳곳에서는 만화 캐릭터를 담은 벽화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이곳 브뤼헤에서 꼭 방문해야 할 곳 중 하나가 베긴회 수도원이다. 평화로우면서도 고즈넉한 풍경을 간직한 이곳은 중세시대 수녀들이 머물렀던 곳이라고 한다. 이 수도원을 둘러싸고 있는 곳이 ‘사랑의 호수’다. 브뤼헤의 상징인 백조들이 사람과 손닿는 곳에 가까이 노닐고 있어 연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라고 한다.

브뤼헤는 한때 레이스, 금속, 양조, 인쇄 등의 공업 중심지로 명성을 떨친 덕에 다양한 체험 박물관도 많다. 특히 레이스 공장을 견학하면 실제 기술자들이 레이스를 만들어내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화려하게 손을 놀리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는 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브뤼헤 역시 겐트와 마찬가지로 브뤼헤 시티카드를 사용하면 모든 교통수단과 박물관, 관광지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브뤼헤 베긴회 성당을 감싸안고 있는 ‘사랑의 호수’. 이곳에는 늘 백조들이 노닐고 있다.
브뤼헤 베긴회 성당을 감싸안고 있는 ‘사랑의 호수’. 이곳에는 늘 백조들이 노닐고 있다.
브뤼셀에서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안트워프는 벨기에에서도 화려하고 도시적인 풍경을 자랑하는 곳 중 하나다. 안트워프 왕립예술학교 등이 유명한 곳인 만큼 예술과 패션의 도시로 유명하다. 그러나 안트워프에서 절대 놓쳐선 안 될 한 가지는 다름 아닌 다이아몬드다. 이곳에는 세계 최대의 국제 보석 감정평가기관과 교육기관이 몰려 있다. 세계적으로 600명 이상의 전문 감정사들이 활동하고 있는 그야말로 세계적인 다이아몬드 거래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다이아몬드의 도시’답게 다이아몬드 쇼핑센터 또한 잘 갖추어져 있어, 보다 저렴한 가격에 화려한 보석을 손에 쥘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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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IN EUROPE] 숨겨진 유럽의 보석, 벨기에
유럽 여행 갈 때, 파리는 덤!
유럽 내 어디를 가든 파리를 덤으로 얻을 수 있는 방법. 바로 파리를 경유해 하루나 이틀 정도 스톱오버(S/T) 여행을 즐기는 것이다. 샤를 드골 공항을 중심으로 ‘유럽의 허브’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만큼, 최종 목적지가 유럽의 어디가 됐든 파리에서 잠시 들러 여독을 푸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에펠탑, 루브르 박물관, 그리고 몽마르트 언덕까지 ‘유럽 여행의 모범 답안’들이 모두 모여 있는 곳이니 말이다.

이때 프랑스 국적기인 에어프랑스 항공편을 이용한다면 여러모로 유리하다. 2004년 에어프랑스와 KLM의 합병 이후,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두 항공사의 네트워크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파리를 경유한 뒤 유럽 내 어디든 손쉽게 접근이 가능하다. 짧은 기간이나마 파리에서의 하룻밤을 만끽하고 싶다면, 항공편 이용 시 스톱오버를 미리 신청해둘 것을 권한다. 스톱오버란 중간 기착지에서 환승하는 시간이 8시간 이상 또는 하루 이상을 넘기는 경우 공항 밖으로 나가 관광을 즐길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에어프랑스와 KLM네덜란드항공은 대한항공과의 공동 운항편을 포함해 주간 총 25회 항공편을 제공한다. 유럽 항공사 중 가장 많은 직항 운항 편수다.

만약 파리에서 스톱오버 여행을 즐기는 이들이라면, 파리를 대표하는 쇼핑의 거리 샹젤리제에 위치한 나폴레옹 호텔을 추천한다. 샤를 드골 공항으로부터 차로 40분 거리, 개선문에서는 걸어서 5분 거리에 위치해 있어 접근성이 탁월하다. 프랑스 전통 객실의 전형을 보여주는 그림과 가구들, 모닥불 등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브뤼셀·겐트·브뤼헤·안트워프(벨기에)=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 | 취재 협조 에어프랑스KLM·프랑스 파리 관광청·벨기에 관광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