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타운에서 노후 보내기
ETIREMENT ● Second Life Essay

[한경 머니 = 우재룡 한국은퇴연구소장] 영어권 사람들에게 실버타운이라고 말하면 못 알아듣는다. 동양인들은 젊을 땐 흑발을 가지고 있다가 나이가 들면 은색(실버)으로 변색이 된다. 그래서 중장년들이 모여 사는 멋진 고급 주거시설을 실버타운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서양인들의 금발은 고령이 되면 흰색으로 변한다. 미국에서는 실버타운을 ‘리타이어먼트 커뮤니티(retirement community)’라고 한다. 우리말로 은퇴자 공동체라는 뜻으로, 비용과 형태가 다양한 실버타운이 발달돼 있다.

수년 전에 미국 보스턴에 있는 뉴브리지라는 실버타운을 방문한 적이 있다. 뉴브리지는 비영리법인으로 운영되는 곳이다. 원래는 보스턴에 거주하는 유대인들만 모여서 노후생활을 하던 곳인데 100년 전에 모든 시민에게 개방한 뒤 비영리재단으로 확장됐다고 한다.

입주민들은 건강할 때는 빌라나 코티지 형태의 독립된 가옥에서 생활하다가, 몸이 불편해지면 중앙에 있는 요양시설로 이동해 지낸다. 주로 의사와 변호사, 사업가와 같은 보스턴의 부유층들이 70대 후반에 입주하고 있었다.

인상 깊은 점은 실버타운 중에서 뉴브리지처럼 요양시설을 갖추고 있는 곳을 ‘계속 간호가 가능한 실버타운(continuing care retirement community)’이라고 하며, 가장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요양원과 요양병원을 자체에 보유하고 있는 실버타운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유독 치과의사가 상주하고 있었다. 한국과 달리 미국은 의료비 부담이 큰데, 특히 치과치료 비용이 비싸기 때문이다. 다른 치료는 근처의 대학병원과 연계해서 제공되고 있었다. 식사, 여가, 시설 등은 한국의 최고급 실버타운과 비슷했다.

미국에서는 실버타운이 매우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다.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플로리다와 같이 미국 아래쪽에 있는 기온이 따뜻한 곳에는 수만 명이 거주하는 대규모 실버타운이 발달해 있다. 이런 지역을 선벨트(sun belt)라는 별칭으로 부른다. 애리조나주에 있는 피닉스라는 도시에는 거의 8만 명에 달하는 선시티(sun city)라는 대규모 실버타운이 있다. 실버타운 자체가 소형 도시를 형성했는데, 중산층들이 선호하는 비교적 저렴한 곳이다. 이렇게 미국에는 비용과 형태가 다양한 실버타운이 잘 발달돼 있다.

미국에서도 최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태어난 베이비부머들이 은퇴하면서 주거를 옮기고 있다. 그런데 베이비부머들 중에서 실버타운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선택 기준이 크게 변하고 있다고 한다.

고성장 시기를 누려서 재산이 많은 편인 베이비부머들은 은퇴 후에도 경제활동이나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이어가길 원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은퇴 후 사회활동을 편리하게 할 수 있는 도시 근처의 실버타운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선벨트 지역에 있는 안락한 휴식형 실버타운을 선호했다면, 이제는 선벨트를 벗어나 적극적인 활동이 가능한 도시로 연결되는 실버타운을 찾고 있다.

우리나라 실버타운은 만들어지기 시작한 지 20년쯤 된다. 위치에 따라 도시형, 전원형, 근교형 등이 있으며, 소유 형태에 따라 임대형, 구입형, 회원권형 등이 있다. 현재 전국에 실버타운은 100여 개 정도 있는 것으로 보이며, 100세대 이상이 입주해 있는 대규모 실버타운은 30여 개로 알려져 있다. 실버타운의 입주보증금은 1억~8억 원대로 다양하게 분포돼 있으며, 매월 생활비는 적게는 80만~90만 원에서 많게는 300만 원대까지 소요된다.

그렇다면 실버타운에서 노후를 보내기 위해서는 어떤 점을 고려해야 하는지 알아보자. 첫째로는 자신의 생활 스타일을 미리 정해야 한다. 실버타운은 안락한 시설 속에서 생활수준이 비슷한 사람들 수백 명이 모여서 지내는 곳이다. 매일 수십 가지 여가활동이 활발하게 열린다. 수영장, 헬스클럽, 고급 식당, 도서관, 사우나 등의 고급 시설이 설치돼 있기도 하다. 심지어 집 안 청소를 대행해주기도 한다. 이런 편안한 곳에서 노후의 삶을 여유롭게 보내고 싶은 사람들에게 실버타운은 적합하다.

하지만 복잡한 인간관계에 시달리기 쉽고, 주위 사람들과 갈등도 만만치 않다. 70~90대까지의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분위기가 밝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누군가는 실버타운에서의 대화는 “자녀 자랑, 질병, 죽음밖에 없더라”며 자신과는 너무 안 맞는다고 한다. 독일의 어느 학자는 “노인끼리 모여 살면 그 자체가 불행이다”라는 말도 한다. 이런 분위기가 싫은 사람은 실버타운에서 생활하기 어렵다.

둘째는 실버타운의 재정 상태를 잘 평가해야 한다. 지난해 초 경기 분당에 있는 고급형 실버타운의 운영업자가 부도가 났다. 실버타운은 입주하면 몇 십 년씩 생활하는 곳이라서 시설 운영주체가 장기간 건실하게 경영될 수 있어야 한다. 게다가 분양 후 세월이 가면 시설이 노후화되므로 지속적으로 시설투자를 할 수 있는 투자 여력이 있어야 한다. 이런 시설 운영업체를 발견하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셋째는 고령으로 몸이 불편해질 때를 대비해서 요양시설을 갖추고 있는 실버타운을 선택해야 한다. 미국에서도 고급 실버타운은 간병 서비스까지 제공하고 있다. 물론 실버타운 내의 요양시설을 이용하려면 추가로 비용을 지불해야 하므로 이런 점을 잘 따져볼 필요가 있다.

넷째는 가능하면 실버타운 입소 전에 단기간 거주하는 체험을 해봐야 한다. 노후에 장기간 생활할 곳을 선택하기 때문에 일주일 이상 길게는 한두 달간 살아보기를 추천한다. 이때 주거비용을 자신이 물어야 하므로 이런 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체험을 꼭 해볼 필요가 있다.

필자가 강연 때 참석자들 가운데 실버타운을 선호하는 사람을 파악해보면 100명 중 2~3명 정도 손을 든다. 또 남성들보다 여성들이 더 선호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선진국과 달리 아직 실버타운을 생소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의 아파트라는 주거공간은 외국의 실버타운 못지않은 시설을 갖추고 있다.

미국에서는 자신이 사는 동네를 실버타운처럼 만들자는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거주자 중 노인들의 비중이 높으면 자원봉사 단체가 생겨나 동네식당, 병원, 헬스장, 극장 등을 묶어서 대형 실버타운처럼 생활하기 편리하게 만드는 운동이다.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자연발생적인 실버타운(Naturally Occurring Retirement Community, NORC)이라고 한다. 미국의 거의 모든 도시로 펴져 있는 새로운 노후생활 운동이다. 우리나라의 노인 인구는 현재 약 710만 명이며, 앞으로 1900만 명까지 증가할 예정이므로 NORC와 같은 다양한 실버타운이 활성화돼 외롭지 않은 노후생활이 가능해지길 기원해본다.

우재룡 소장은… 국내 은퇴 설계 대중화에 기여한 은퇴 분야의 최고 전문가다.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장을 지냈으며, 현재 한국은퇴연구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수천 명의 은퇴자를 컨설팅한 경험을 바탕으로 <재무설계 무작정 따라하기>, <긴 인생 당당한 노후 펀드투자와 동행하라>, <오늘부터 준비하는 행복한 100년 플랜> 등의 저서를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