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이석원 여행전문기자] 쇼팽의 도시 파리. 낭만주의 시대에 오스트리아 빈으로 음악가들이 몰렸다면, 19세기 들어서서 수많은 음악가들이 파리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위대한 음악이 창조됐던 거리 곳곳은 평화로움과 상념이 가득한, 그저 빛나는 예술이다.
스물한 살 쇼팽의 파리를 거닐다
푸아소니에르 대로 27번지 집을 나선 쇼팽은 몽마르트르 거리를 천천히 걸어서 노트르담 데 빅투아르 거리에 들어섰다. 길게 늘어선 가로수들을 보는데 불현듯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간 조국 폴란드가 떠올랐다.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조국은 아직도 나를 기억해줄까?’ 이런저런 생각이 복잡하게 얽힌다.

상념 속 무심코 걷던 길이 루이 14세의 동상이 서 있는 빅투아르 광장에 이르렀다. 집 주인이 이 근처에 볼 만한 저택이 있다고 했다. 팔레 루아얄 정원이라고 했던가?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발루아 거리에 접어드니 개인의 저택인지, 궁전인지, 공원인지 모를 만큼 큰 규모의 짙푸른 정원이 나온다.
스물한 살 쇼팽의 파리를 거닐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키요틴이 있던 콩코르드 광장.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등은 물론 당통과 로베스피에르 등 혁명의 주역들도 이곳에서 사형을 당했다. 콩코르드라는 명칭은 혁명의 시대를 지낸 후 화합의 장소라는 의미에서 이름이 붙여졌다.]

1831년 스물한 살의 쇼팽이 처음 파리에 와서 산 집 부근을 산책했다면 이런 풍경이었을까? 아르누보풍의 건물들을 보면서 쇼팽의 산책을 떠올리면 과잉정서증후군쯤 되려나? 하긴 1834년 프랑스 화가 이지도르 다냥이 그린 <푸아소니에르 대로>라는 그림을 봐도 지금의 그것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황영관 선생이 쓴 <유럽 음악도시 기행>에 따르면, 쇼팽이 파리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집은 오페라 가르니에와 아주 가까운 쇼세 당탱 거리다. 쇼세 당탱 거리 5번지에서 3년 넘게 살았던 쇼팽은 인근 38번지에 있던 호텔로 옮겨 다시 3년을 살았다.

물론 쇼팽은 오페라 가르니에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오페라 가르니에는 쇼팽이 1849년에 죽고 26년이 지난 후 지어졌으니. 쇼팽의 집이 있던 건물에 있는 ‘요염한 여자’라는 뜻의 프랑스 식당 코퀘트(Coquette)의 전혀 요염하지 않은 중후한 종업원 아저씨도 이 건물에 쇼팽이 살았다는 사실은 모르는 눈치다.
스물한 살 쇼팽의 파리를 거닐다
[태양왕 루이 14세의 절대 권력의 상징이기도 한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과 대운하.]

그러고 보면 쇼세 당탱 거리는 좀 특별하다. 쇼팽이 살던 5번지 건물에 그보다 54년 전 모차르트가 그의 어머니 안나 마리아와 함께 두 달간 살았다. 사실 파리는 모차르트에게는 아픔이 있는 도시다. 어머니와 독일, 프랑스를 여행하다가 1년 반 정도 머물렀다. 그런데 파리에 머무는 도중 어머니가 사망했다.

쇼팽과 모차르트가 살았던 집 건너편 2번지에서는 이탈리아 낭만파 오페라의 거장 로시니가 1868년 숨질 때까지 11년간 살았다.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500회가 넘는 공연을 한 <빌헬름 텔>로 인해 로시니의 인기도 상당했다. 거의 매일 자신의 집에서 파티를 열었던 로시니 탓에 동네 사람들이 잠을 설쳤다는 얘기도 있다. 그래서일까? 20대 초반 청년 모차르트와 쇼팽이 슬픔 또는 상념으로 산책했을 것 같은 거리지만 로시니로 인해 한결 유쾌하게 느껴진다.

남서쪽 콩코르드 광장과 튈르리 정원 쪽으로 천천히 10여 분을 걸으면 나오는 방돔 광장은 원래 루이 14세의 기마상이 세워진 곳이다. 프랑스 대혁명 때 이 기마상은 파괴되고 나중에 나폴레옹의 오스테를리츠 전투 승리를 기념한 기념비가 세워진다. 그러나 이곳 12번지는 결국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슬픈 쇼팽이 숨을 거둔 곳이기도 하다.
스물한 살 쇼팽의 파리를 거닐다
[
노트르담 대성당은 수많은 오페라들의 배경이 됐다. 대부분은 우리에게 <노트르담의 꼽추>로 알려진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들이다.]

위대한 음악가들의 거리
프랑스 파리가 특별한 것은 세상의 위대한 음악가들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출신의 음악가인 드뷔시나 라벨, 비제 등은 차치하고라도 파리의 거리 곳곳에는 외국의 위대한 음악가들의 숨결이 남아 있다. 낭만주의 음악 시대까지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음악가들이 몰렸다면, 19세기에 들어서서 수많은 음악가들은 파리에 보금자리를 틀고 음악을 창조해냈다.

오페라 가르니에 부근 카푸친 거리 8번지에서는 독일 출신 오펜바흐가 죽기 전 4년 동안 살며 <호프만 이야기>를 작곡했다. 독일 출신으로 프랑스 오페라 전성시대를 열기도 했던 마이어베어도 리세스가 11번지에서 살았다. 에펠탑 근처 파리 16구에 있는 베르디가는 <나부코>, <일 트로바토레>, <리골레토> 등을 작곡한 주세페 베르디가 살았던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레오 카락스 감독의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 때문에 유명해진 센강 아홉 번째 다리 퐁네프 인근 31번지에 살았던 바그너는 파리에서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골격을 프랑스어로 만들었고,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작곡하기도 했다. 리스트가 그 천재적인 피아노 실력을 쌓은 곳도 파리 국립도서관 부근 멜가 13번지였으니 이쯤 되면 파리는 확실히 위대하다.
스물한 살 쇼팽의 파리를 거닐다
[(좌)노트르담 대성당의 상징인 장미 문양 스테인드글라스. 이곳을 통해 들어온 태양빛은 성당 내부의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우)루빈스타인과 호로비츠가 즐겨 들었다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파이프 오르간.]

지하철역을 빠져 나와 뒤쪽을 돌아보면 석양을 등진 오페라 가르니에가 찬란하다. 한때 밀라노 라 스칼라, 빈 국립오페라극장과 더불어 유럽 3대 오페라 극장이었던 곳이다. 오페라 바스티유가 생긴 후로는 주로 발레 공연을 하지만, 아직도 저 극장에서 마리아 칼라스의 그 화려한 벨칸토가 울려 퍼지는 듯하다.

오페라 가르니에 건너편 그랜드 호텔 1층에 있는 카페 드 라 페(de la Paix)에서 레드와인 한 잔을 시켜놓고 앉았다. 한국 사람이냐고 묻는 웨이터는 정답을 맞히고 신이 난 아이마냥 밝은 표정으로 카페 자랑에 빠진다. 이 카페가 유명한 것은 오페라 가르니에를 건축한 샤를 가르니에가 이 카페의 외관도 만들었기 때문이란다.

‘3대 테너’인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는 공연을 마치고 나면 약속이나 한 듯 이 카페의 스테이크와 함께 샤토 무통을 마셨다고 한다. 마리아 칼라스는 한때 애인이었던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와 이곳에서 샴페인 돔 페리뇽을 즐겨 마셨다나.
스물한 살 쇼팽의 파리를 거닐다
[센강에 놓인 다리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통하는 알렉상드르 3세 다리. 러시아의 황제 알렉상드르 3세를 기념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파리 5구 뷔세리 거리에 있는 서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2층은 오래된 책들의 향이 코끝을 한없이 간질이는 곳이다. 헤밍웨이와 제임스 조이스가 초라한 몸을 의탁하기도 했던 곳. 거의 100년이 된 이 서점 2층 쏟아질 듯 빼곡히 쌓인 책들 사이 넓은 창으로 보이는 노트르담 대성당이 유독 빛난다. 아직 이 오래된 고서점의 향기가 더 절실해서 성당으로 가는 발목을 잡는다. 일주일쯤 서점 3층에서 숙식을 의탁하고, 방 한편 오래된 타자기 앞에서 시간을 허비할 수 있다면 하는 잡념과 함께.

수천 개의 얼굴을 가진 도시

오페라 <루살카>로 유명한 러시아의 작곡가 알렉산더 다르고미슈스키는 1847년 노트르담 대성당을 배경으로 한 오페라 <에스메랄다>를 발표한다. 1831년에 출간된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를 원전으로 한 작품이다. 슬로바키아의 민족 음악가로 유명한 프란츠 슈미트가 1914년에 발표한 <노트르담>도, 스페인 민족 음악의 아버지 펠리페 페드렐의 <수녀>도 노트르담 대성당을 배경으로 한 오페라다.
스물한 살 쇼팽의 파리를 거닐다
[샹제리제 거리의 시작점이기도 한 개선문. 파리가 세계 문화의 수도임을 과시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쇼팽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불리는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은 파리에서 연주 여행을 할 때면 종종 노트르담을 찾았다. 특히 연주가 잘 안 풀리는 날 그는 노트르담에서 연주하는 파이프 오르간을 듣곤 했다. 그리고 루빈스타인은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 20세기 피아노에 있어서 루빈스타인과 쌍벽을 이뤘던 호로비츠도 파리에서 연주회가 있을 때면 가장 먼저 노트르담의 오르간 연주를 들었다고 한다.

개선문에서 시작해 별 깊은 생각 없이 샹젤리제 거리를 걷는다. 파리의 골목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은 분명하다. 루이비통이니 에르메스니 샤넬이니 하는 예술품인양 뽐내는 고가의 명품 매장들은 그냥 지나친다. 그냥 천천히 걷는다. ‘게으름뱅이’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 플라뇌르(flâneur)는 아무 생각 없이 천천히 걷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조지 거슈윈은 이 샹젤리제를 걷는 미국인이었다.
스물한 살 쇼팽의 파리를 거닐다
[밀라노 라 스칼라, 빈 국립오페라극장과 함께 유럽 3대 오페라 극장으로 불렸던 오페라 가르니에. 1875년 나폴레옹 3세의 명령으로 샤를 가르니에가 건축했다.]

1928년 ‘랩소디 인 블루’가 공전의 히트를 친 후 그 후속곡을 만들기 위해 파리를 찾은 거슈윈에게 파리는 뉴욕처럼 정신없는 도시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느긋했고, 천천히 움직였다. 유럽 최대의 도시는 화려했지만 차분했다. 아주 커다랗고 긴 길 위에서 거슈윈은 유쾌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곡이 ‘파리의 미국인’이다. 이 곡을 발표한 후 거슈윈은 “이건 베토벤의 교향곡이 아니다. 해학적인 곡이지. 엄숙할 것 없어!”라고 말했다. 적어도 샹젤리제를 플라뇌르 하던 거슈윈에게 파리는 그런 곳이었나 보다.
스물한 살 쇼팽의 파리를 거닐다
[1919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영미 문학 전문 서점. 흔히 파리의 100년 고서점으로 불린다.]

샹젤리제 거리를 플라뇌르 하다 보니 다다른 곳. 마리 앙투아네트가 키요틴의 이슬로 사라진 콩코르드 광장에 오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커다란 대관람차와 크고 작은 놀이기구들이 즐비하지만 아직도 200년도 전에 이 자리를 휩쓸었던 대혁명의 피가 흐르는 듯하다. 한껏 즐거운 저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은 듯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고트프리트 폰 아이넴은 필자와 비슷한 생각을 했나 보다.

독일 작가 게오르크 뷔히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오페라 <당통의 죽음>은 루이 16세나 마리 앙투아네트와는 또 다른 죽음을 그린다. 대혁명의 중심이었지만, 혁명 동지인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키요틴에서 죽임을 당한 조르주 자크 당통을 그린 작품이다. 물론 당통을 그렇게 죽인 로베스피에르 자신도 같은 방식으로 죽임을 당한 콩코르드 광장. 한없이 평화롭고 행복한 이 공간이 복잡한 상념으로 가득한 이유다.
스물한 살 쇼팽의 파리를 거닐다
[평화라는 뜻을 지닌 카페 드 라 페는 파리에서도 가장 유명한 카페다. 오페라 가르니에 건너편에 있는데, 전 세계 문화예술인들의 휴식은 물론 사르트르 등의 지성인들이 토론을 벌이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파리는 수천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세계 문화의 수도라고도 불리지만 혁명의 시대 시위대를 효과적으로 진압하기 위해 재구성된 인공의 도시라는 비난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의 거리 하나하나, 크고 작은 건물 하나하나, 공원과 궁전, 그리고 작은 상점 하나하나가 그저 빛나는 예술이다. 19세기와 20세기의 위대한 음악가들이 잠시라도 살아보고 싶었던, 그리고 뜨거운 창작의 열정을 불태웠던, 그래서 파리는 어쨌거나 아름답고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