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25) '해양의 나라'가야연맹
배 모양을 한 5세기 삼국시대 토기. 무덤 속 부장품이며, 비슷한 것이 일본 고분에서도 발견된다.

배 모양을 한 5세기 삼국시대 토기. 무덤 속 부장품이며, 비슷한 것이 일본 고분에서도 발견된다.

한반도 남동부 해안지역에는 기원전 1세기 초부터 한반도 서북부의 세형동검 등 청동기 및 철기문화와 토기문화가 유·이민과 함께 들어왔다. 이 무렵 만들어진 창원의 다호리 고분에서는 청동검과 중국제 거울, 각종 철제품, 오수전과 토기들, 붓, 화살 등이 출토됐다. 근처 사천의 늑도 유적지에서는 철기류와 토기들이 나왔으며 일본 야요이 중기의 토기도 출토됐다. 1세기 유적인 김해 양동리 일대에서도 철기 유적이 나타났다. 실제로 《삼국지》 변진(弁辰 또는 卞辰)조에는 나라에서 철을 생산하니 한(韓) 예(濊) 왜(倭)가 와서 취하며, 매매할 때는 철을 사용한다는 기록이 있다.
해양무역 활발한 상업국가
또 연나라 명도전(원조선의 화폐라는 주장이 나온다)과 그 후의 오수전, 화천 같은 화폐가 서해 북부 해안지대를 거쳐 한반도 남부 해안을 지나 제주도, 일본 열도까지 발견된다. 일종의 화폐 유통권이 성립된 상황을 반영한다. 삼한 소국의 일부는 바다를 건너 중국 지역은 물론 일본 열도와 무역을 하고 식민지도 건설했다. 일본 열도에는 기원을 전후한 시대에 100여 개의 소국이 있었고, 3세기 전반 무렵에는 30여 나라가 있었으며, 야마대국이 제일 컸다. 당연히 이 소국들의 주체는 한륙도에서 건너간 개척민이었다.
김해 양동리 고분에서 발굴된 청동거울.

김해 양동리 고분에서 발굴된 청동거울.

이처럼 초보적인 무역권의 범위가 동아지중해 전체로 확산되면서 일본 열도가 그 시스템에 편입되는 역사의 전환기에 남해동부 해안에는 ‘무역도시’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삼한의 해양 소국들은 강력한 선단을 보유하고 안전하고 효율적인 뱃길, 좋은 항구와 선원을 확보하는 해양력 경쟁을 벌여야 했다. 물목을 장악한 구야한국, 즉 금관가야가 급속도로 성장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다. 그래서 김해 양동리에서 2세기 말에 살았던 수장급 무덤에서는 두 개의 중국제와 일곱 개의 모방품 청동거울을 비롯해 넓적한 청동창, 굽은옥, 목걸이 등 야요이 문화의 상품이 출토된 것이다. 근처인 대성동 유적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니까 김해를 핵으로 삼은 가야는 초기부터 한·중·일을 연결하는 해양 무역이 활발한 상업국가였다.
도시국가 연맹체의 한계
하지만 가야는 하항(河港) 도시국가들과 해항(海港) 도시국가들의 연맹체였으므로 몇 가지 한계가 있었다. 내부적으로 통일이 불완전했고, 소국 간에도 물길의 장악과 무역권을 놓고 불필요한 갈등을 벌였다. 김수로왕은 바다를 건너온 석탈해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자 주사(舟師) 500척을 동원해 해전을 벌인 끝에 승리했다. 또 3세기 초 남해 중부의 해양소국들이 가야를 공격한 ‘포상팔국(浦上八國)의 난’이 발생했을 때 신라의 도움으로 극복했다. 마치 에게해에서 해양폴리스 간에 벌어진 갈등과 비슷하다.

그런데 4세기에 들어서면서 동아시아 질서에 더 큰 변화가 생겼다. 고구려가 남진을 시작하고, 일본 열도의 가치에 주목한 백제는 전라도를 장악한 뒤 남해안의 해상권과 무역권을 놓고 경쟁체제에 들어갔다. 동쪽에서는 신라가 남부 해양 질서에 도전장을 내기 시작했다. 또한 왜 소국들은 가야를 피해 백제 남안과 서안을 거쳐 중국 해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가야는 왜를 필요로 하는 백제와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무역권을 넓게 확장했다.
일본열도 조직적 진출로 해양제국 모색
이렇게 역사의 전환기에 직면하면서 가야는 초기의 ‘디아스포라(고국을 떠나는 사람·집단의 이동)’ 단계를 넘어 일본 열도에 조직적으로 진출했다. 문화 경제를 넘어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때문에 일본 열도에 건국신화와 지명 등을 비롯해 가야와 연관된 흔적을 많이 남겼다(윤명철, 《한국해양사》). 만약 강력한 정치세력이 무력을 이용해서라도 가야연맹의 통일을 이룩했다면 더 강력한 고대국가로 발돋움했을지 모른다. 물론 그 결과가 가야나 한민족에게 긍정적으로 나타난다고 확신할 순 없다. 그래도 여전히 아쉬움은 남는다.

400년, 백제를 항복시킨 광개토태왕은 신라의 구원 요청을 명분으로 낙동강 하류까지 진격해 임나가라(任那加羅)를 급습했다. 이 여파로 전기 가야연맹은 궤멸되고, 일부는 북쪽의 고령 대가야를 중심으로 계속 발전했다. 그리고 일부는 일본 열도로 진출해 대한해협의 양안을 지배하는 해양제국으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 기억해주세요
동국대 명예교수
사마르칸트대 교수

동국대 명예교수 사마르칸트대 교수

김해를 핵으로 삼은 가야는 초기부터 한·중·일을 연결하는 해양 무역이 활발한 상업국가였다. 하지만 가야는 하항(河港) 도시국가들과 해항(海港) 도시국가들의 연맹체였으므로 통일이 불완전했고, 소국 간에도 물길의 장악과 무역권을 놓고 불필요한 갈등을 벌였다. 4세기에 들어서면서 고구려가 남진을 시작하는 등 역사의 전환기에 직면하면서 가야는 일본 열도에 조직적으로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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